즐겨찾기+ 최종편집:2024-07-27 오후 03:02:45 회원가입기사쓰기전체기사보기
전체기사
커뮤니티
공지사항
결혼/돌
부고안내
 
뉴스 > 오피니언 +크기 | -작게 | 이메일 | 프린트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은 맹사(猛士)와 용사(勇士)
전쟁은 인간의 성스런 목숨을 해치기에 성이라는 글자의 사용은 기름과 물처럼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다
문경시민신문 기자 / ctn6333@hanmail.net입력 : 2024년 01월 13일(토) 15:29
공유 : 트위터페이스북미투데이요즘에
ⓒ 문경시민신문
왕이 되는 것보다 더 높은 경지에 올랐다는 뜻으로 쓰는 ‘성(聖)’자가 있다. 음악엔 악성, 바둑엔 기성, 시엔 시성이라 불러도, 전쟁에서 높은 경지에 오른 것엔 성(聖)자가 어울리지 않고, 백전용사나 역전용사, 아니면 맹사와 용사가 적절하지 않을까? 전쟁은 인간의 성스런 목숨을 해치기에 성이라는 글자의 사용은 기름과 물처럼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다.

전쟁은 인류 죄악의 총합이자 인류 스스로 파멸하는 길을 걷는 행위라고 말하면서 왜 싸움을 일삼는가? 그것은 영토, 자원, 종교, 사상, 이권쟁탈 등의 갈등에서 비롯되며 인간의 욕망과 함께 선천적인 폭력성이 동반된다. 전시에는 평시라면 꿈도 꾸지 못할 행위가 곳곳에서 용인되기에 인간의 존엄성은 실종된 채 거짓정보, 위조지폐, 주거침입, 살인, 상해, 강간, 방화, 협박 등이 있어도 그걸 막을 구제수단은 종전밖에 없다. 그럼에도 지구 곳곳에서 크고 작은 전쟁이 일어나고 있고 우리나라는 선전포고도 없이 남침한 북한 공산주의자들의 625 만행으로 인해 해방의 기쁨을 채 누리기도 전에 세계 최빈국이 되고 만다.

천신만고 끝에 UN의 도움으로 전쟁 발발 3년 뒤 휴전할 수 있었고, 지금의 경제대국으로 민주주의 국가가 된 것은 다행 중 다행이다. 전쟁은 승리한 장수들의 왕관 계관식이지만, 병사들은 죽음을 향한 잔인한 여행임을 아는가. 총알은 심장을 관통하고 총성은 영혼을 관통하므로 전쟁을 일삼는 행위는 가장 큰 죄악으로 간주 된다. 그러기에 평화를 위해서는 미리 전쟁에 대비하라고 말한다. 맥도날드가 있는 나라끼리는 전쟁을 하지 않는다는 ‘황금아치(맥드날드 로고) 이론’은 자본주의가 아닌 공산주의자들이 전쟁을 일삼는다는 말로, 국가란 항시 자강의 힘을 길러 국난에 대비해야만 할 것이다.

전쟁은 게임이 아니다. 게임에서 죽으면 다시 시작할 수 있지만 전쟁에서는 영원히 사망한다. 전투를 앞둔 병사의 눈빛을 한번이라도 본적이 있는 사람은 전쟁하자는 말을 꺼내지 못한다. 은폐와 엄폐를 반복하며 주위를 살피고 어디에 설치되어 있을지도 모르는 부비트랩이나 지뢰를 조심하며 초긴장과 불안이 연속된다. 진짜 총소리를 한번이라도 들어본 적이 있는 사람은 총소리나 폭음이 영화나 게임과는 비교도 안 된다는 걸 안다. 작은 탄환의 총소리조차 천둥소리 같고, 멀리서 들리는 총성도 콩 볶는 소리로 들리는데 어찌 전쟁을 영화 속에 지나가는 한 장면처럼 가볍게 생각할 수 있겠는가.

중국군의 개입으로 “멸공전선에 국민은 총무장하자. 통일완수를 위해 손에 무기를 들어 공산도배를 섬멸하자. 너도나도 멸공전선에 참여하라.”는 등의 신문기사들이 줄줄이 쏟아지기 시작하며 전쟁의 판이 더 확대된다. 1952.6.26. 경향신문에는 “멸공통일의 날, 거룩한 겨레의피!”라는 제하에 6.25전쟁 2주기를 맞아 열린 멸공통일의 날 기사가 눈에 띄는데, 당시 '멸공'은 1950년대에 가장 많이 사용되는 단어였으며 김병하와 이창직 두 사람은 멸공전선에서 용감하게 싸운 애국자들이다.

결국 625전쟁의 주요전투 결과는 1950년 12승 36패, 1951년 24승 19패, 1952년 12승 8패, 1953년 11승 5패로, 총 127전 59승 68패로 우리가 열세였으나 마지막에 누가 더 잘 싸웠느냐가 더 중요했다. 1953년도 휴전협정을 앞두고 거둔 전쟁은 11승5패의 성적으로 지금의 휴전선이 38선보다 훌쩍 위로 올라가는 성과를 거두었다. 총탄이 빗발치는 전장에 나가 목숨 걸고 싸운 맹사와 용사의 공적을 한번 조명해 보기로 한다.

< 맹사(猛士) 김병하(金柄廈) >

그는 1927년 농암면 대정마을 손이 귀한 집 장손(외동아들)으로 태어났다. 윗대에서 5대 독자로 내려왔기에 부모들은 손이 번성하길 간절히 소망했다. 1947.10월 결혼을 한 후 2년 반 정도가 지나 625전쟁이 발발하여 다른 사람들은 피난을 갔으나 혼자 집을 지키며 나무를 길게 장총처럼 다듬어 총검술과 포복을 하고, 거울 앞에서 모자를 쓰고 경례를 하는 등 제식훈련을 반복했다. 그가 이런 행동을 하자 삼촌들은 조카가 이상해졌다며 핀잔을 주거나 심지어는 그 행동을 다시 하지 못하도록 사랑채 기둥에 묶어놓는 벌을 주기도 했으나 누구도 그의 고집을 꺾지 못했다.

남달리 의협심이 강하고 정의감에 불타던 열혈 나이에 큰 난리가 터졌는데 이대로 피난하며 숨어있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독자인데다가 나이가 당시 징집 기준보다 초과해 군대를 가지 못하는 것에 심한 불만을 갖고 있었다. 사나이로 태어나 나라를 위해 반드시 전장에 나가 싸우리라는 다짐을 반복하며, 밤이면 신혼을 즐기기보다는 뒤란으로 나가 조부와 부모 눈을 피해 기합소리를 낮추어가며 총검술 연습을 계속했다. 이런 그의 훈련 사정도 모르고 조부님은 그저 대를 이을 떡두꺼비같은 증손이나 낳아주기를 바랐으니 기대는 실망으로 이어질 것이 뻔했다. 그렇게 기회를 엿보면서 시간은 흘러갔고 국군이 북한군에게 밀려 낙동강 전선까지 내려갔다는 비보가 들려오니 더욱 애가 탔다. 하지만 대를 이를 아들 하나를 낳아야 큰 불효는 면하게 되니 근엄하신 조부의 기대를 무너뜨리고 싶진 않았다.

1950.9월 맥아드 장군이 주도하는 인천상륙작전의 개시로 전쟁은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고 우리 군이 서서히 북한군을 밀어내고 국토를 회복해 나갔다. 인천 상륙작전의 성공을 등에 업고 서울을 탈환한 국군과 유엔군이 북상하여 압록강 국경에서 북한의 임시수도 평안북도 강계시를 향한 마지막 공세를 시작했다. 그러나 이때 갑자기 중국군의 불법 개입으로 인한 대공세로 다시 우리 군이 대대적으로 퇴각하는 1951.1.4 후퇴를 맞게 된다. 이후 양군이 38선 부근에서 밀고 밀리며 1953.7.27. 휴전협정이 체결되기 까지 초반은 소강상태, 후반엔 치열한 접전을 벌이는 상황이 전개 된다.

이 무렵 병역관련 업무는 국방부 육군본부에서 담당했는데, <병역법>에는 만20세에 달하면 병역판정검사를 받고, 결과에 따라 징집했다. 하지만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전선이 크게 확대되어 이를 지킬 30만명 이상의 병력 충원이 필요하여 제2국민병 등록제를 추진하게 된다. 그는 이런 징병제도를 눈여겨보고 있다가, 드디어 1952.7.14. 아내가 첫아들을 순산하자 이젠 전선으로 나가 싸울 때가 되었음을 직시한다. 그러고는 아무도 모르게 군청을 찾아가 자원입대를 신청하고 얼마 뒤 신체검사까지 받고 적격 판정을 받는다.

당시 입소는 전쟁 중이어서 육군훈련소가 있는 제주도로 가기위해서는 부산으로 내려가 배를 타야했다. 1952년 동짇달, 숨을 쉬면 코가 쩍쩍 얼어붙는 고추같이 맵도록 추운 날 집을 떠난다. 집이 점점 멀어질수록 자꾸만 눈에 밟히는 근엄하신 조부님과 부모님, 그리고 아직 낯선 느낌의 아내와 갓난 아들을 두고 떠나는 마음이 어찌 편하겠는가. 끝내는 흐르는 눈물을 닦지만 날씨가 추워 이내 얼어버린다. 나라를 위해서 떠나는 장도인 만큼 마음을 굳세게 다잡고 부산으로 향한다.

중앙부두에서 1,400명을 실은 LST 배를 타고 제주도 훈련소로 가는데 바닷바람이 너무 강하게 불어 1주일이나 걸리며 심한 뱃멀미까지 한다. 신병의 산실인 대정읍 모슬포에 제주 육군 제1훈련소에 도착, 그곳은 신병을 양성해 서울 재탈환 등 반격의 발판을 마련하기 위해 우리나라 최남단인 서귀포시에 설립한 훈련소다. 6.25.전쟁 발발 당시 대구에 제1훈련소가 창설되었으나, 1951.1.4. 후퇴시작하자 육군훈련소를 모슬포로 옮겼고 섬마을은 갑자기 10만명을 수용하는 거대한 천막도시가 되었다. 그는 1953.1.17.부터 3주 정도 기본 훈련을 받는 동안 물자가 부족하고 환경이 좋지 않아 손발이 얼고 옷 속에 손을 넣으면 이가 한주먹이나 떨어질 정도였다.

나중 군 입대 소식을 안 그의 집안은 초상집을 방불케 했고, 친지와 이웃사람들의 위로의 발길이 이어진다. 전시에 전쟁터에 나가서 살아온다는 건 기적일 수밖에 없는 것, 정화수를 떠놓고 새벽기도를 매일 올리던 모친은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고, 아내는 섣달의 긴긴밤을 갓난아기와 함께 울음범벅이 된다. 조부는 장손의 의로운 자원입대를 장하게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 집안의 기둥이 큰 일이라도 생기면 안 된다는 걱정이 뒤따라 설날을 택해 거금을 마련하여 제주도 훈련소로 면회를 간다. 25세의 육군 이병 9290187 김병하, 짧은 만남 뒤 긴 기다림은 늘 노심초사의 연속이었다.

1953.4월, 휴전회담이 급진전 양상을 보이자 양측은 군사상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기 위해 최전선에 화력을 집중시켰다. 이 무렵 금성전투, 백암산전투, 화살머리전투, 금화전투 등 이름만 들어도 끔찍한 격전지에서는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는다는 피의 능선이라 불리며 절망적인 소식들이 이어진다. 그 중에서도 화천군 북쪽에 위치한 금화(현 김화) 지역에서 벌어진 중부전선 금화지구 전투와 금성지구 전투는 매우 치열했다. 그는 금화전투에 야전공병으로 투입되어 적군의 기동을 저지하고 아군의 진격을 돕는 교량과 장애물 설치, 지뢰매설과 제거 등의 임무를 맡았다. 밤이면 중공군이 몰려오는데 조명탄이 올라가면서 까만 밤이 환하게 밝아져 마치 대낮 같았고, 밤새도록 콩 튀기듯이 적군과 아군의 총탄이 서로를 향해 쏟아졌다. 그러다 적군의 포가 취사반에 떨어져 일주일간 밥을 굶고 건빵으로 견디던 날도 생겼다. 금화는 최대의 격전지인 강원도 철의 삼각지(철원/금화/평강)로 가장 많은 희생자가 발생한 중부전선의 심장부였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적진 가까이 접근하는 통로를 만들기 위해 지뢰를 제거하다 탐지기 오작동으로 지뢰가 폭발하며 위치가 노출되어 적들의 공격을 받아 피투성이가 된다. 폭발음과 함께 팔다리가 다 날아간 줄 알았으나 다행히 붙어 있긴 했지만 아무리 애써도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그러다 의식을 잃었는데 나중에 깨어보니 온몸에 붕대를 칭칭 감은 채 시야가 희미한 병원이었다. 그 전투에서 큰 부상을 입었으나 운 좋게 작전을 하던 미군 헬기에 의해 구조되어 대구병원으로 후송되었다. 하지만 부상이 잘 회복되지 않았고, 전투 후유증까지 겹쳐 부산 특수정신병원에 입원하게 된다. 한 달 정도 치료를 받고 대구병원으로 돌아가 단기간 치료 후 퇴원을 한다. 이때 가족들은 곧 전역할 것을 기대했으나 본인 고집으로 다시 논산훈련소로 재입소, 신병훈련을 다시 받고 자대 배치를 받을 무렵에야 드디어 피 흘리는 전쟁은 끝이 난다. 1955.9.30. 무사히 일병으로 전역을 하게 되었지만 온몸이 가렵고 따끔거리는 증세는 비오면 날이면 더욱 심해져 견디기 힘들 정도였다.

전쟁의 시간이 가고, 전선의 처절하고 참혹한 현장은 희미해져 가지만 나이가 들어갈수록 전쟁의 후유증은 몸 곳곳에서 나타난다. 그러던 어느 날 아들이 큰 병원에 가서 건강검진도 받고 가렵다는 다리도 사진 촬영을 해보자고 했다. 촬영 결과 의사는 놀람을 금치 못하며 왠 파편이 다리에 이렇게 많이 박혀 있느냐며 물었는데, 병명은 신경폐쇄증! 그것은 오롯이 전쟁이 남긴 상처였다. 하지만 너무 깊이 박힌 게 많아 신경을 잘못 건드리면 반신불수가 될 수 있으므로 제거수술은 어렵다고 했다. 그간 몸이 아프다 하면 꾀병이라고 하던 오해가 풀리고 너무 늦었지만 비로소 국가 유공자로 지정이 된다.

전장에서는 일주일은커녕 하루만 지나도 심신이 피로해지고 피폐해진다. 자신의 목숨이 달려 있는 수많은 변수들이 산재한 상태에서는 극도로 고통스럽다. 전장에서 부상을 당하는 고통은 평소 부딪치고 넘어져서 다치는 것과는 비교가 안 된다. 가장 흔한 부상에 속하는 총상의 엄청난 고통은 물론이며 폭발 등으로 사지가 절단되는 끔찍한 경우가 비일비재하여, 차라리 총에 맞아서 죽는 것이 양반일 정도로 잔인하다. 치명상을 입어 가망이 없으면 흑색명찰을 달고 아무 치료도 없이 그냥 버려지는 걸 상상해 보라. 그러므로 의롭게 전사하거나 명예롭게 살아남는다는 건 둘 다 무척이나 어려운 것이다.

힘들어도 힘들다 하지 않고 아파도 아픔을 혼자 온몸으로 안고 살다간 그는 625전쟁에 솔선하여 자원입대한 힘있고 용맹스런 영웅이다. 그리고 전쟁이 끝난 후 훈련 재입소를 하면서도 끝까지 병역의 의무를 완수함은 타의 귀감이 되는 일이다. 부잣집 외동 아들이자 장손인 그가 조부와 부모 그리고 처자식까지 과감히 등지고 오로지 전선으로 달려 나간 그 이유는 무엇일까? 죽음의 사선을 넘어 천운으로 살아 돌아온 그는 죽음을 각오하고 나라를 위해 목숨을 건 것을 귀히 보아 하늘이 그를 도와 지켜준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우리는 그를 일러 용맹과 힘을 겸비한 맹사라 불러도 부족함이 없으리라.

< 용사(勇士) 이창직 >

이창직은 1930.8.24 농암면 대정마을에서 태어나 1952.10말 징집통지를 받고 신체검사를 임하게 된다. 같은 마을 김병하보다는 3살 아래로, 그는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전선이 크게 확대되어 많은 병력충원을 위한 제2국민병 등록제 추진으로 의무 징집대상이 된 것이다. 당시 그는 혼례식을 갓 치른 새신랑이었는데 금실홍실의 꿈은 멀리 사라지고 검은 먹구름이 몰려온다. 아기도 갖지 못한 새색시가 청상과부가 되고 마는 불운이 닥쳤으니 누구도 이를 막아줄 수도 없고 이웃에서는 그저 혀만 쯧쯧 찰 뿐이다.

그는 1953.1 김병하와 같은 배를 타고 제주도로 건너가 훈련소에서 96일간의 훈련 등을 마치고 이등중사 계급장을 단다. 그리고 소대선임하사로 멸공전선에 투입되어 목숨을 건 일전을 벌이게 된다. 그가 큰 공을 세운 전투는 바로 M-1고지전투(Battle of Hill M1, M1高地戰鬪)다. 1953.6.10부터 6.22일까지 양구의 어은산 인근 고지에서 국군 제20사단이 중국군과 전투를 벌인 대표적인 고지쟁탈전 가운데 하나다. 피의 전투라고 불리는 백마고지 전투는 10일 동안 고지 주인이 12번 바뀌었으나, M-1고지전투는 13일 동안 16차례나 뺏고 빼앗기는 치열한 전투로 최후에는 국군이 고지를 탈환하는 승전보였다. 후일 이는 한국전쟁사에서 가장 치열한 전투로 손꼽히며, 이보다 더 값진 승리가 없다고도 말한다.

야전에서 참호는 매우 중요하므로 전선이 움직인 후에 보병들은 하루 종일 삽을 한 손에 쥐고 구멍을 파야만 생존율이 높아진다. 목숨을 건 전투 1할에 목숨을 건 토목 작업 9할이 되는 셈이다. 그는 선임하사로서 항상 선두에 서서 솔선수범했으니 소대원들이 그를 잘 따를 수밖에 없었다. “부하 한 사람이 죽는다면 자기나 자기 가족 한사람이 죽는다.”는 걸 좌우명으로 삼고, “살아도 같이 죽어도 같이 죽자.”는 깡생깡사(깡으로 살고 깡으로 죽는다)의 전우애를 발휘한다. 무모한 돌격은 피하면서도 위험이 닥치면 부하를 대신해 자신이 방패가 되어 희생하겠다는 의지를 자주 보여 주었다. 돌격 소대장으로는 매우 우수한 군인이었고 준 지휘관으로서도 탁월한 능력을 갖춘 용맹스런 군인이었다.

이 기간 동안 국군과 북한군은 지금의 휴전선 부근에서 서로 대치한 상태로 전술적 요충지인 고지를 둘러싸고 치열하게 공방전을 벌인다. 국군 제20사단은 938고지를 중심으로 주저항선을 편성해 삼각산(1220m)·어은산(1277m)·백석산(1142m)으로 이어지는 능선에서 중국군과 대치한다. 6.10일 21시 중국군이 1개 대대 병력을 동원해 M1고지를 공격해오자 국군은 고지 정상의 주진지를 포기하고 퇴각한다. 다음날 새벽에 고지를 탈환하기 위해 공격에 나섰으나 탈환에 실패하고 만다. 하지만 6.12일 새벽, 1개 대대 병력을 동원해 다시 공격에 나서 한용택(韓龍澤) 일병 등의 활약으로 고지를 탈환하는 데 성공한다. 그러나 대규모 포격을 가하며 반격에 나선 중국군의 공세에 밀려 다시 고지를 빼앗긴다.

6.13일과 14일에도 M1고지에서는 여섯 차례나 번갈아가며 고지를 차지할 정도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그러다 M1고지는 중국군의 손으로 넘어갔고, 중국군은 14일 밤부터 938고지와 1,090고지에도 공격을 가해왔다. 이젠 이 고지들을 빼앗기면 양구 일대가 북한군의 손에 넘어가고 휴전선이 남쪽으로 상당 부분 물러날 수밖에 없었으므로 중동부전선을 관할하던 미국 제10군단장은 국군 제7사단을 투입해 이 지역의 병력을 증강시킨다. 이후 치열한 공방전이 계속되다가 6.18일 1090고지를 탈환하는 데 성공한 국군 제20사단 제62연대는 다음날 작전지역을 제7사단 제5연대로 넘기고 양구 방산리로 이동하게 된다. 그래서 6.19일부터는 938고지와 1090고지에서는 제7사단이, M1고지에서는 제20사단 제61연대가 중국군과 전투를 벌였다.

6.21일 중국군이 대규모 병력을 동원해 다시 파상적인 공격을 가해오면서 하루에만 M1고지의 주인이 세 번이나 바뀌는 격전이 벌어진다. 그러나 이렇듯 치열한 전투가 반복되는 가운데에서도 국군은 결국 M1고지를 탈환하는 데 성공한다. 6.22일 전폭기의 공중 지원과 포병의 화력 지원을 받아 국군의 반격이 더욱 거세지자 파상적으로 이어지던 중국군의 공격이 중단된다.

이 전투에서 중국군은 22차례 공격을 해서 16차례 고지를 점령, 국군은 18차례 공격을 펼쳐서 16차례 고지를 탈환했다. 이러한 치열한 공방전 속에서도 국군 제20사단은 마침내 M1고지를 탈환하는 데 성공해 전투가 미국 제10군단이 지키던 동쪽 지역으로 확산되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 결국 중국군은 6월 대공세를 펼치고도 전선을 변화시키는 데 성공하지 못했고, 국군은 휴전협정이 이루어질 때까지 38선 이북 지역인 양구 일대를 지켜낼 수 있었다.

이창직이 소속된 국군 제20사단은 1953.2.9일에 창설된 사단으로 병력 대부분은 신병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휘관의 솔선수범과 병사들의 사활을 건 고투를 바탕으로 중국군 제33사단의 2개 연대 이상의 병력을 상실케 하였으며, 사단 좌측 국군 제5사단이 새로운 방어선을 점령하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그는 멸공전선 전투에서 선임하사로 참전했고, 이 전투에서 적 사살 등의 공적이 뚜렷하게 인정되었다. 이등중사 이창직(李昌稙, 9212549)! 그는 1955년 전역시 곧바로 국가로부터 영광스런 화랑무공훈장을 받고, 그해 큰 아들을 얻는다. 이 훈장은 전투에서 결사보국의 각오로 용감하게 헌신 분투한 결과 탁월한 능력을 발휘, 다대한 전과를 올린 이들에게 주는 공훈이니 그에게 이 훈장은 결코 과하지 않음이다.

그가 전쟁이 끝난 후 집으로 돌아 왔을 때 부인이 첨에는 죽었던 사람이 다시 살아온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어 언 듯 무섭기까지 했단다. 16차례나 고지를 뺏고 뺏기는 전투에서는 그냥 살아서 집으로 돌아온 것만도 기적이라 할 수 있는데 큰 공까지 세웠으니 얼마나 자랑스러운가. 그는 전장에 나가 나라를 위해 싸운 것은 지극히 당연한 책무라고 말했고, 자신은 살아남아서 희생된 전우들에게는 늘 미안하다며 평생 속죄하고 살겠다고 했으니 가슴이 저려온다. 그래서인지 고향에 돌아와 끝까지 고을을 지키며 묵묵히 선한 농부로 황소처럼 뚜벅뚜벅 농사를 지으며 살다가 고이 하늘나라로 떠나셨다. 그는 떠났지만 그가 남긴 공적은 불멸이며, 그가 이 고을에서 최초로 화랑무공훈장을 받은 수훈자로 기록되어 우리는 그를 진정한 애국 용사라고 부르지 않을 수 없다.
문경시민신문 기자  ctn6333@hanmail.net
- Copyrights ⓒ문경시민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이전 페이지로
실시간 많이본 뉴스  
문경시 마성면, 올해 첫 출생 ..
2024 문경 세계태권도 한마당..
흥덕생활공원 및 어린이 놀이터 ..
문경소방서, 점촌119안전센터 ..
문경시 박순달(여 70)씨를 애..
2024 문경 유소년 축구 페스..
민선8기 취임 2주년을 맞이하여..
'2024 박정희컵국제오픈태권도..
국제환경의 변화에 따른 한국자체..
문경시, 명예국제협력관 추가 위..
최신뉴스
문경대학교 간호학과, 2024년..  
농암면, 농기계 보관창고 및 골..  
동로면, 출생 가정에 축하 선물..  
산북면지역사회보장협의체 산북꿈나..  
호계면지역사회보장협의체 간담회 ..  
문경읍 주민자치위원회·이장자치회..  
문경시, ‘찾아가는 세무상담실’..  
문경시종합자원봉사센터‘문경시 청..  
문경소방서, 점촌119안전센터 ..  
양금희 경제부지사, 제7회 중앙..  
경북교육청, 과테말라 디지털 교..  
점촌2동 새마을남녀지도자협의회,..  
마성면 새마을회, 오리영양죽 나..  
문경시 산북면 체육회, “건강한..  
작은 눈맞춤으로부터 시작되는 친..  
산양면 체육회, 중복맞이 경로당..  
문경시, 물놀이 취약지역 합동점..  
읍·면·동 환경업무 담당 공무원..  
문경시 아프리카돼지열병(ASF)..  
제5회 문경시 초·중·고 학생 ..  
문경시, 찾아가는 지적민원 현장..  
문경대학교 HiVE센터, ‘드론..  
문경대학교 간호학과, 경북교육청..  
문경소방서, 중앙시장 화재안전 ..  
경북교육청, 고등학생 독도지킴이..  
김학홍 행정부지사, 호우 피해지..  
문경署, 하계방학 운동부 선제적..  
흥덕생활공원 및 어린이 놀이터 ..  
탑이벤트 천병철 대표, 경로당 ..  
점촌2동 지역사회보장협의체“쿨(..  
호계면 주민자치위원회, 중복맞이..  
문경읍지역사회보장협의체, 시원한..  
문경읍지역사회보장협의체, 시원한..  
문경대학교 별암봉사단, 영신유원..  
공무원연금공단 대구지부, 폭염기..  

인사말 광고문의 제휴문의 이메일주소 무단수집 거부 개인정보취급방침 찾아오시는 길 청소년보호정책 구독신청 기사제보
상호: 문경시민신문 / 사업자등록번호: 511-81-08345/ 주소: 문경시 마성면 신현1길 20번지 / 등록일 : 2013년4월29일 / 발행인.편집인: 김정태
mail: ctn6333@daum.net / Tel: 054-553-8118 / Fax : 054-553-2168 / 정기간행물 등록번호 : 경북 아00261 / 청소년보호책임자 : 김정태
본지는 신문 윤리강령 및 그 실천요강을 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