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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경시 농암면 애국 계몽운동가, 유학자 김상건 (金商建, 1881-1972) 옹의 발자취를 찾아서
문경시 농암면에서 출생
문경시민신문 기자 / ctn6333@hanmail.net입력 : 2023년 07월 13일(목) 0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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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경시민신문
김상건옹은 1881년(고종18년) 문경시 농암면에서 출생, 6세부터 숙부에게 천자문을 배우기 시작, 16세에는 2년간 속리산 구병곡(장례원)에 장기간 투숙하는 등 22세까지 16년간을 면학과 강론을 지속하며 경학과 시문 등에서 두각을 보였다. “사색과 학이시습(學而時習)을 하지 않으면 천재라도 만인에게 부끄러운 백치가 된다.”는 말을 좌우명으로 삼아 아호를“백치(百恥)”라 정하고, 남다른 성실과 탐구정신으로 면학에 정진해 학식과 덕행을 쌓았다. 하지만 자신의 꿈을 제대로 펼치지 못하고 청년기, 장년기에는 불우하게도 한일합방에 따른 국권상실과 갑작스런 815 해방, 그리고 비극의 625전쟁 등의 국난을 겪게 된다. 이런 극한 상황에 조금도 굴하지 않고 공익과 국권 수호를 위해 선공후사의 정신을 발휘하며 남다른 헌신과 협동정신으로 빈민구제와 애국 계몽운동 등을 성공적으로 펼침으로서 대한민국의 독립 및 건국에 크게 기여한 자임

< 민족자본 등의 육성을 위한 성산조합 결성 >

1913.11 김상건은 농촌 사정이 날로 피폐해지자 지역 주민들의 공존과 민족자본의 육성을 위한 뜻을 품고 김상련, 정병묵씨와 논의를 거쳐 원근 인사들을 모아 성산조합(成産組合)이라는 일종의 사금융 조합을 창설했다. 지역 사람들끼리 상부상조하는 개념의 자치조직이었으나 자칫 총독부에 불법으로 비춰질 것을 우려하여 문경군수 성두식(成斗植)에게 사전 보고해 승인을 얻은 다음, 조합취지서를 작성, 공인까지 받아 정식 출범(경북 최초의 금융인 경일은행보다 7년 빠름)하면서, 재정은 김상건, 문부(文簿)는 권태혁이 담당했다.

이후 조합을 운영하면서 보다 안정화된 체제를 구축해 나가고자 1925년에는 그의 둘째 아들 김일영을 서울 <실천부기전수학교>(정주영이 소를 몰고 서울로 올라온 학교)에 유학시켜 소정의 과정 이수 후 조합에 근무케 하여 주산과 부기를 이용한 보다 선진화된 조합운영을 꾀한다. 그러나 1926.1 조선총독부가 점점 확산되던 민간 협동조합을 포섭·통합해 식민지 지배를 강화해 나가면서 금융 통제가 심화되자 위기의식을 느끼고 1928년 성산조합의 문을 닫고, 또 다른 방법의 민족자본 육성 방법을 고민, 그동안 지역민들의 가난 퇴치와 삶의 질 향상에 기여했다.

< 한천서옥 운영으로 문맹퇴치 및 후진양성 >

ⓒ 문경시민신문
김상건은 일찍이 총을 드는 사람과 칼을 드는 사람도 필요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국민들을 깨우쳐야 한다는 교육의 중요성을 깨닫고 자신이 가장 잘 할 수 것은 서당교육이라는 점에 주안점을 두어 작지만 의미 있는 교육 계몽운동을 구상했다. 한일합방 당시 교육기관으로는 보통학교 정도가 있었으나 거리도 멀고 의무교육이 아니었으며 교육비가 너무 비쌌기 때문에 진학률이 10%정도에 불과한 실정이었고, 일본의 신교육을 반대하는 사람들도 있어 서당 기능의 확대가 필요했다.

그는 이런 시대적 상황을 명찰하고 나라가 국권을 회복하려면 국민들의 문맹을 퇴치하는 것이 부국강병으로 가는 길이기에 본인이 갖고 있는 역량으로 지역 청년들을 가르치고자 1914.7초 33명의 회원을 결성, 건축비를 모금한 뒤 서당 건립을 시작했다. 1914.10월 340원을 들여 수간의 서당(寒泉精舍)을 짓고 술과 고기를 장만하여 노소가 모여 낙성식을 개최했으며, 향후 서당 운영을 위해 황조 2말씩을 거출해 별도 적립했다. 이후 학생들을 효율적으로 잘 가르치고 유지하는 비용으로 모은 기초자금을 15년 동안 600여원으로 늘렸으나 참여 계원들 중 친일 성향을 띤 일부 회원들의 반대로 의견이 불일치되자 회원당 18원씩 나누어 주며 서당문을 닫으면서 <한천서옥>, <한천정사 일기>라는 2권의 책을 남겼다.

ⓒ 문경시민신문
후에도 김상건은 이에 굴하지 않고 종곡리 261번지 소재 자신의 사랑채(방3칸) 문 위의 벽에다 <한천정사>라고 글씨를 써 붙이고 계속 서당을 70세까지 훈육을 이어가며 지역민들의 문맹퇴치와 구국 정신 함양 등에 진력을 다했다.

< 농촌진흥운동을 통한 소득 증대 기여>

김상건은 경학뿐만 아니라 다재다능하면서도 일의 귀천을 가리지 않는 열정으로 임하여 1925.3.5 지역 못자리 품평회에서 두서의 성적으로 입상했다. 1933년 봄에는 농촌진흥운동의 일환으로 설립한 <농촌진흥조합의 실행위원>으로 선출되었고, 1934년에는 농촌진흥조합에서 조합저금과 부인회 성미대금을 합해 330원으로 답 3두락을 사서 공동 작업을 진행하는 등 적극적이고 탁월한 업무 능력을 발휘하여 피폐한 농촌의 소득 증대를 통해 빈민 구제에 기여하였으며, 1938.4.6. <농암금융조합 감사>로 재임 피선되어 소임을 다하면서 지역경제 발전에 이바지하였다.

< 청년단 결성 및 활동으로 자강의식 배양 >

1928년 민족자본 마련을 위해 만들었던 <성산조합> 문을 닫고 난 뒤 다른 방법으로 자금 모우는 비책을 모색했으나 점점 일제 강점기의 통제가 극심해 지자 김상건은 대정동(100호 정도) 마을 자체에서 청년들을 모아 소규모로 조직(26명)을 운영하기로 하고, 1935년 <청년단>이라는 계를 출범시킨다. 이는 대동계의 성격을 띠고 있으나 내면으로는 민족 자강을 위한 국력을 배양과 빈곤을 구제함에 뜻을 두었다. 하지만 당시 상황이 너무 어렵고 일제 치하에서 먹고 살기가 궁핍했던 처지라 개인적 위험을 무릅쓰고 3월 하순경 자신의 소유 11두락을 금융조합에 저당 잡혀 920원을 갖고 7마지기의 논을 사서 청년단원들이 벼를 공동 경작해 가을에 160여말의 쌀을 수확하는 등 첫해부터 개가를 올렸다.

당시 청년들의 문맹을 해소하고자 밤에는 정사에서 훈장이 되어 직접 공부를 가르치며 민족정신을 북돋우고, 아침에는 나팔을 불고 징을 치며 청년단을 매일 소집해 동네와 공원 등 곳곳을 돌며 소똥 개똥을 모아 비료를 만든 다음 농사에 사용하여 소득증대를 이뤄나갔다. 단원들에게는 근면을 생활화하고 체력을 단련시키며 유사시 나라를 위해 힘을 보태려는 대비 태세를 갖춘 소규모 단체로 자리 잡았다. 이 청년단의 괄목할만한 성장은 오래도록 계속 되었고 후대에 까지 이어지면서 그후 70여 년 동안 명맥을 유지하며 소득증대는 물론 민족정신을 거양 발전하는 동력이 되었다.

< 일제 탄압에 구로회(九老會)를 결성해 후일 도모 >

ⓒ 문경시민신문
1930년대에 이르러 일제의 민족 말살정책이 가속화되자 김상건은 운신의 폭이 좁아드는 것을 직감한다. 53세 되는 해인 1933.4.15. 종친 9명의 뜻을 규합해 <구로회(九老會)>를 조직했는데, 이는 당나라 백거이가 조정에 불만이 있거나 혼란한 세상에 익숙하지 않은 노인 8명과 함께 <향산구로회(香山九老會)>를 만든 것을 본떠 문경 선유동구곡의 관람담(제5곡) 바위에 <9명의 이름>과 <구은대(九隱臺)>, 세심대 바위에는 <구로천(九老川>이라 큰 글자로 새기고 결의를 다졌다. 구은대는 겉으로는“遯世藏蹤 不關塵累(세상에 숨어서 종적을 감추고 진계의 번거로움을 관계치 않으며 자연을 사랑한다)”라고 표방했으나 여기서 자연은 곧 조국으로, 구로가 모여 나라를 사랑하며 지켜내야 한다는 특별한 함의를 담았다. 이런 구로의 <관란담 결의>는 맹자가 ‘물을 보는 데는 반드시 물결을 보아야 한다’는 것처럼, 물결(세파)의 흐름을 보면서 근원(나라)을 깨닫고 도(독립)가 실현되도록 노력한다는 뜻이었다.

ⓒ 문경시민신문
이를 실천하기 위해 같은 해 겨울, 구로가 기금을 모아 구은대 부근에 수간의 집을 지어 비밀리에 친교와 강학의 장소로 활용하고, 주변의 땅 1만5천여 평을 사서 작물을 재배하는 등 장래의 수용계획을 세워 후일 도모를 위한 자금 마련을 진행해 나갔다. 구로 중 가장 연장인 김태영(1869~1951)은 35세(1903)에 중추원 의관으로 출사했으나 나라를 잃은 치욕을 당하자 은둔하며 민족혼을 기리기 위해 숭조사업을 펼쳐나갔다. 월담사, 소양서원, 영류정, 금하정을 중수하고, 당대의 석학을 탄생시킨 김상보(김태영의 조부)의 뜻을 기리고 의병장 운강의 정신을 계승 지원하기 위해 <옥봉서당>을 중수하며, 운강의 영정을 존치하는 등 선지자로서 소명의식을 잃지 않았으니 김상건도 그를 따라 의병을 지원하며 묵묵히 구국의 길을 걸었다.

< 일본군함 제작을 저지한 항일 투쟁 >

속리산에서 발원한 농암 쌍룡천 옆에는 3백여 년이 넘는 송림이 우거진 대정공원은 김상건이 사는 대정마을 소유로 동네에서 보면 앞이 터져 복이 샌다는 이유로 수구막이를 위해 선조들이 조성한 인공 숲이다. 이 숲은 마을 수호신과 같은 역할을 하며 동제를 지내왔는데, 1929년 큰 소나무 7~8주를 베어 동네 빚을 갚았으나 그해 겨울 마을 사람 20여명이 사망한 사건이 발생했다. 이에 김상건은 이 숲을 영세토록 잘 보존해야겠다고 생각하고 1933.7월 <대정공원>이라 처음으로 이름 짓고, 승경을 발굴하여 육송정(六松亭), 임청대(臨淸臺), 부지도(不知島), 하한대(夏寒臺), 구몽탄(鷗夢灘), 삼괴정(三槐亭)이라 6곳을 선정하며, 동민들과 기념식수까지 하였다.

그러나 태평양 전쟁이 막바지에 이르던 1944년, 일본이 군함이 부족하자 군함을 만들기 위해 관령으로 대정공원 소나무 벌채(문경 임축회사)를 지시하자 김상건은 이에 분노하며 마을사람들을 동원, 적극 반대 투쟁을 펼쳐 결국 총독부 지시를 꺾고 92주를 존치하고 일부만 벌목함으로써 산림의 효율적 보존은 물론 일본 군함이 당초 계획대로 제작되지 못하도록 저지함으로써 전쟁에서 일본이 패하는데 조력하였다. 항일운동을 통해 현재 우리나라 최초의 <항일 애국의 숲>으로 지칭되며 소나무들이 존림되어 오고 있고, 625때에는 주요 지형지물로써 국군의 포사격 진지로 적극 활용되어 국익에도 도움이 되었다.

< 유도회, 학교 지원활동 등으로 문맹퇴치와 애국심 고양 >

김상건은 지역사회에서 남다른 식견과 학덕을 가진 인물로 자신이 가진 재능을 최대한 발휘, 민족의식이 소멸되지 않도록 다방면에 걸쳐 유교사상 확산과 교육지원 활동을 펼치며 문맹퇴치와 경애사상 고취 및 민족정신 등을 일깨우는 계몽 실천주의자로서 귀감이 되었다.
1924.3.10 문경유도회 장의, 1925.5.1. 농암공립 보통학년 연장 기성회 위원, 1927.1.20. 농암공립 보통학교 학무위원, 1930.1 문경군 학교평의원, 1931.7.10. ~ 1935.12 문경군 학교평의원, 1931.9.28. 농암공립보통학교 보호회 회장, 1938.2 농암간이학교 기성회장, 농암심상소학교 증축 기성회장, 1939.2.15. ~1941 농암번영회장, 1941. 화산 간이학교(청화초등) 건축, 1944.2.11. 경상도 유도(儒道) 연합장 등을 역임했다.

유도회 활동을 통해 경상도 북부 고을에 효친사상을 더욱 고양시켰고, 보통학교 학무위원과 평의원, 보호회와 기성회 회장 등을 맡으면서, 당시 의무교육이 아니므로 납부금을 부담해야 했으나 문맹퇴치가 답이라는 인식하에 학교 신축과 증축 및 운영에 부족한 성금 모금 등 재정적 지원과 지역민들의 면학 독려 등을 독보적으로 주도해 나갔다. 번영회장시에는 우체국, 제중공소, 축산지소 건립, 학교증설, 다리건설, 대정보 건설과 기타 도로 공사 등을 성공적으로 완수함으로써 지역의 교육과 공공시설 마련 및 편의시설 확대 등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 항일사상 고취와 의병정신 계승 >

조선이 일본 제국주의 침략을 받게 되자 전국에서 1894년부터 의병이 일어나 1907년 의병전쟁이 최고조에 이르게 되는 데, 이 무렵 김상건은 의병전쟁을 눈앞에서 목격하지만 국가가 침략에 대항할 능력을 상실하고 자신도 나약한 체력임을 개탄한다. 16세가 되던 해인 1896.2.26 창의대장 운강 이강년이 농암장터 개바우에서 반역자 3명을 효수하는 것을 보고 잠시 심한 충격과 내면의 갈등을 겪지만 나라를 지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크게 깨닫는다. 집에서 가까운 개바우가 범죄자의 처형장이 아닌 신성한 의병창의 출정 장소이자 성지라고 새롭게 인식한 뒤, 이후 자신이 할 수 있는 사명이 무엇인지 고뇌하다가 교육으로 국민을 깨우치고 농촌을 발전시켜 힘을 기르는 <실력양성운동>을 기치로 걸고 시대가 요구하는 계몽운동에 앞장서기를 자처했다.

그는 문경은 우리나라에서 손꼽히는 3대 의병도시 중의 하나이며, 애국정신으로 충일한 백성들이 많아 스스로의 힘으로 나라를 지키고 구하기 위해 목숨 바쳐 싸운 충절의 역사가 전해오고 있음을 자각한다. 그후 망국의 한을 품은 채 청장년들에게 항일사상을 고취시키고자 <한천정사>의 건립과 <청년단>을 조직하고, 계몽과 실력양성 교육을 통해 애국정신을 함양하며 자강의 힘을 길러 민족정기를 바로잡으려고 노력했다.

ⓒ 문경시민신문
특히, 1948.11. 의병장 운강 이강년선생 문집을 발간 점운하고 의연금을 기부하며 추모시(又吟五百年終運 先生獨恥知損身 斧鉞下孤海東垂 : 오백년 운수가 다하니 선생 홀로 부끄러워하네. 몸을 도끼아래 버리니 우리나라가 보이네) 한편을 써서 헌시하기도 했다. 1949.2.10 운강문집을 출간하고, 1949.3.8. 운강선생 면봉을 상주 화북에 안장했으며, 1949.6 운강유계 부계장으로 피선되는 등 호국 선열들의 의병정신을 오늘에 되살리는 작업에 앞장섰다. 1959.9 의병장 도암 신태식선생의 <창의문식(倡義文識)>을 지었고, 1963.1 도암선생 <창의일지>의 오류를 수정하는 등 자랑스런 문경의 의병장 두 분에 대해 후세들에게 항일정신 고취와 계승을 위해 다각적으로 고군분투하며 남다른 솔선과 헌신을 꾀하였다.

< 임시건국후원위원회 의장으로 건국에 기여 >

1945.8.15. 일제 치하에서 광복이 되었지만 기쁨을 맞기도 전에 38도선을 경계로 미소 양국에 의해 민족이 양단되는 새로운 통한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국내 정치상황은 임시정부가 정권을 이을 것을 희망하는 민족주의자들과 여운영 계통의 적색 좌익분자들의 대립으로 혼란이 깊어갔다. 이런 심각한 문제를 하루빨리 해소하고 새로운 시대적 과제를 발굴해 지역사회의 갱생과 발전을 도모하고자 농암에 <임시건국후원회>를 설립했였다. 후원회장은 학식과 명망이 있고 애국심이 충일한 사람을 의장으로 뽑는 가운데 김상건이 추대되었는데, 그는 흠결이 없이 유림활동과 교육계, 금융계는 물론 각종 단체에서 모범적 운영 보여준 능력이 인정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해방으로 인해 갑자기 바뀌는 제도적 혼란이나 모순된 사회적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노력했으며, 그 해소책으로는 올바른 교육이 가장 중요하다고 인식했지만 대변혁의 소용돌이 속에서 중심을 바로 잡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다. 소련의 지시로 신탁을 지지하는 좌익계열의 활동이 강화되자 농암국민학교와 한천서당 등에서 강습회를 열어 민족정신 함양에 박차를 가하는 한편, 마을 친구인 임근호 선생에게 중학교 설립을 건의하여 1952년 청암중학교가 조기 개교되는 견인차 역할을 통해 지역 사회의 민심을 빠르게 수습하며 자유 민주주의 나라 건국에 음양으로 기여했다.

< 우국충정을 항일의 시로 쓴 나라사랑 >

김상건은 구한말에 태어나 일제 치하에서도 자신의 정체성을 잃지 않고 다방면으로 왕성한 활동을 지속하면서, 특히 많은 시문을 써서 승경을 노래하면서도 민족의 자아각성과 저항의식을 표현했다. 그는 여러 민간조합을 조직하고 육성자금을 만들며 나라를 위한 후일 도모를 위해 안간힘을 썼으나 종국에는 높은 벽이 앞을 가로막고 있었으니 그 분노를 풀 수 있는 건 우국충정을 시로 남겨 많은 사람들과 문화로 소통하며 내면의 힘을 키우는 일이었다. 스승과 교우, 제자들과 서로 시를 써서 공유하며 동시대의 선각자로서 나라에는 무한 애국하고 사회에는 올바른 윤리를 지켜야 한다는 삼강오륜 정신을 확산시켜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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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92세에 세상을 뜰 때까지 우국충정과 애국 연민을 노래한 한시 1,500여편을 남겼다. 자연이나 기행을 노래한 시도 있으나 당시 혼란한 정치 상황이나 어려운 사람들의 목소리를 대변하고 불우한 현실에 처한 자신의 처지를 표현한 시들이 주류를 이루며 민족정기를 끊임없이 이어 나갔다. 사가정, 금하정, 존승제 등의 상량문과 <도암 의병장의 창의문식> 등을 짓고, <구은대고>, <영류정지>, <경덕재>, <존승제>, <신설지>, <윤하정지>, <백치자연보>, <시문집> 등의 문적을 남겨 기록 문화유산의 보전에도 크게 기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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