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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열단 창단 100주년 기념 아나키스트 의열단의 역사 특별 강연회와 문화행사 및 출범식 개최
5일 오후 2시부터 오후 5시까지 약 3시간 동안 종로2가 서울글로벌센터 9층 국제회의장에서
문경시민신문 기자 / ctn6333@hanmail.net 입력 : 2019년 10월 06일(일) 1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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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문경시민신문 | | 역사적 정체성 회복과 미래 민주 청년 육성을 지향하는 아나키스트 의열단은 의열단 창단 100주년 기념 행사 일환으로 5일 오후 2시부터 오후 5시까지 약 3시간 동안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2가 서울글로벌센터 9층 국제회의장에서 아나키스트 의열단 임원 및 단원, 연대 단체 대표 등을 대상으로 <역사 특별 강연회>와 <문화 행사> 및 <출범식> 행사를 가졌다.
*아나키스트 의열단 소개
ㄱ. 창립 목표 및 취지 : 의열 독립 운동 역사 기념 사업 및 한반도의 평화 통일 지향과 미래 세대 민주 시민 청년 육성 사업
ㄴ. 중점 목표 : 역사적 정체성 관련 의열 선양 학술 사업 및 미래 세대 민주 시민 청년 육성
ㄷ. 조직 구성 : (아나키즘 원형 네트워크 지원 조직 형태)
․ 상임고문 : 김원재(인천대 교수), 이장희(전 한국외대 부총장), 노태구(전 경기대 교수), 이태복(전 보건복지부 장관), 장호권(사상계 발행인), 김삼웅(전 독립기념관장)(총 6인)
․ 고문 및 자문위원 : 이덕일(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 김준권(위당연구 소장), 최자영(전 부산외대 교수), 임기호(시인), 김태영(국정저널 회장), 이재문(예술대 교수), 김재용(변호사), 권대섭(평화통일신문 사무국장), 전우용(한국학대학원 교수), 노윤갑(전 KBS 제작부장), 박소정(전 순천 YMCA 이사장), 정지윤(명지대학원 주임교수) 등 (다수 인사)
․ 전국 본부 의열단장(지역본부 의열단장 겸임 ․ 아나키즘 분권 7인 합의제) : 양미애(서울), 황문식(수도권), 손춘수(강원), 이상을(충청), 권진성(영남), 김영광(호남), 양대경(제주) 등 (총 7인)
․ 전국 광역지자체별 7개 지역본부 사무실 운영 중
ㄹ. 사업 내용 :
․ 약산 김원봉 선생 등 의열 기념 사업 및 의열 지사 연구 발굴 사업-(사단법인) 의열독립운동연구소 개소 예정.
․ 의열 100주년 기념 사업
- 학술 세미너 개최
- 사진전, 연극 영화제, 거리 행위 예술, 역사 주제 공연
- 기타 사업 : 한반도 평화 교육, 청년 인재 육성, 민주 시민 의식 교육 등
ㅁ. 5일 창립행사 <회순>
1부 진행 : 서강민 사무처장
- 1부 개회 선언(서강민 사무처장)
- 경과 보고(양미애 단장)
- < 규약 > 의결(황문식 단장)
- 임원 <인사> 의결(황문식 단장)
- 사업 계획서 승인(양대경 단장, 김재용 변호사)
- 예산 계획서 승인(양대경 단장, 김원재 고문 교수)
- 임원 대표 인사(권진성 단장)
- 의열단기 수여(최자영 고문 겸 자문위원장)
2부 진행 : 김준권 박사 위당연구소장
- 역사 특강 <독립운동사에서 의열단의 위상>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 관장)
- 역사 특강 <안중근 의거와 동양평화론> (전우용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3부 진행 : 정숙인(소설가 연극인)
- 축시 낭송 '의열의 꿈!'(소설가 연극인 정숙인)
- 해금 연주 '세월호 아이들에게!' 등 2곡 (서현이 교수)
- 팝페라 공연 '조선의 마음', 일송정 김동삼 선생을 기리는 가곡 '선구자', 의열단 노래이기도 한 '밀양 아리랑'(팜페라 가수 샤이니 제이)
- 대금 연주 및 우리 소리 공연(소리꾼 연주자 김숨(김평부))
4부 진행 : 양미애 단장
- 4부 개회 선언(양미애 단장)
- 국민 의례(국기에 대한 경례, 애국가 제창, 순국 선열에 대한 묵념)
- 전국본부 의열단장 대표 인사(손춘수 단장)
- 격려사(김원재 교수)
- 축사(김원웅 광복회장)
- 축사(이장희 교수)
- 축사(이태복 전 장관)
- 창립 선언문 낭독(김영광 단장)
- 공지 및 폐회(양미애 단장)
※ 5부 : 기타 뒷풀이는 별도 주변 장소
마. 특기 사 안: 지자체별 연대 청년 육성과 민주 시민 교육 및 홍보
연락처: 아나키스트 전국본부 의열단장
권진성 (손전화) 010.3502.1933
※ 특강 원고
독립운동사에서 의열단의 위상
김삼웅(전 독립기념관장)
생명을 내건 정의의 사도들
우리 독립운동사에서 의열(義烈) 투쟁은 여러 독립운동 방략 중에서 가장 돋보이는 투쟁노선이었다. 가장 적은 희생으로 가장 많은 효과를 내는 것이 의열투쟁이다. 또 수단과 방법, 시간과 장소, 인물과 기관을 가리지 않고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외침과 내우가 유난히 심한 우리 나라는 오래 전부터 의열투쟁의 전통이 이어져왔다. ‘의열’이란 흔히 의사(義士)와 열사(烈士)를 가리키거나 그들의 특징적인 행동을 의미하는 용어로 쓰인다. 국난기에 관군이 패퇴하거나 적군에 투항할 때 민간인(백성)들이 궐기하여 침략자들과 싸워서, 이를 물리치거나 전세를 바꾼 경우가 적지 않았다. 여기에는 장렬한 자기 희생이 따랐다.
임진ㆍ정유왜란 때에 의열투쟁이 강력한 저항의 모습을 보였고, 한말 일제침략기에도 수많은 의열사들이 궐기하여 의병전쟁(義兵戰爭)에 참가하고, 여의치 않을 때는 일신을 던지는 단독 의열전을 전개하였다. 1970, 80, 90년대 반독재 민주항쟁 과정에서도 수많은 재야인사ㆍ학생ㆍ노동자가 투신ㆍ분신ㆍ할복ㆍ고문사ㆍ의문사 등의 희생을 감내하면서 민주주의를 쟁취하였다.
의열투쟁은 정규전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전개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한국사의 의열투쟁이 최근 세계 각처에서 나타나고 있는 테러와 다른 것은, 국권회복과 민주화를 요구하는 정의의 실현 방법이어서, 자신을 던지는 지극히 도덕적 수단의 목표 축에 있었다는 점이다. 한말 일제침략세력과 싸운 민간병(民間兵)을 의병이라 한 것이나, 의열단의 경우, “천하의 정의로운 일을 맹렬히 실행한다.” 는 공약 제1조에서 제시한 ‘정의’의 가치에서 잘 설명되고 있다.
일제는 의열단의 존재가 얼마나 공포심을 불러온 대상이었던지 일본 외무대신은 “김원봉체포시 즉각 나가사키(長崎) 형무소로 이송할 것이며, 소요경비는 외무성에서 직접 지출할 것”이라는 요지의 훈령을 상하이 총영사관에 하달하기에 이르렀다. 또한 1920년대 전반기 의열단의 투쟁역량에 대해 조선공산당은 1926년 3월 코민테른에 제출한 보고서에서 “민족혁명전선에서 직접 투쟁하는 단체는 의열단ㆍ신민부ㆍ통의부 밖에 없다.”는 평가도 있었다.
일제 군경과 관리들에게 의열단원은 염라대왕과 같은 존재로 인식되었다. 언제 어디서 불쑥 의열단원이 나타나 폭탄을 던지고 권총을 들이댈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두렵기는 친일파와 악질 지주들도 마찬가지였다. 의열단에서 감행한 주요 의열투쟁은 다음과 같다.
의열단의 주요 활동
1920년 3~6월 곽재기·이성우 등이 국내활동에 사용할 폭탄을 밀양으로 반입하려 한 의거.
1920년 9월 밀양 폭탄 반입사건에 대한 응징으로, 박재혁이 일본인 부산경찰서장을 폭상시킨 의거.
1920년 11월 최수봉 (최경학)이 밀양경찰서를 폭파한 의거.
1921년 9월 김익상이 종로경찰서에 투탄한 의거.
1922년 3월 김익상ㆍ이종암ㆍ오성륜이 상하이 황포탄 부두에서 일본 육군대장 다나카 기이치를 저격한 의거.
1923년 3월 김시현ㆍ남정각ㆍ유석현 등이 경기도 경찰부 황옥 경부를 동원하여 무기와 폭탄을 국내로 반입하려 한 의거.
1924년 1월 관동대지진 때 한인 학살에 대한 응징으로, 구여순ㆍ오세덕 등이 국내 폭동을 시도한 의거.
1925년 3월 이인홍과 이기환이 베이징에서 일제 밀정 김달하를 처단한 의거.
1925년 11월 이종암ㆍ배중세ㆍ고인덕 등이 국외로부터 무기를 반입하여, 거사를 준비하였던 ‘경북의열단사건’.
1926년 12월 나석주가 동양척식주식회사와 조선식산은행을 습격한 의거.
1919년 11월 9일(음 10월 27일) 일단의 조선청년들이 중국 지린성 파허문(巴虛門) 밖 중국인 농민 반(潘) 씨 집에 모였다. 이 집은 자금의 여유가 있었던 이종암이 반 씨로부터 세내어 거처 겸 연락처로 사용되고 있었다. 여기서는 가끔 폭탄제조 실험도 하였다. 일종의 비밀아지트인 셈이다.
반 씨 집에 모인 10대 후반에서 20대 중반까지의 조선청년 13명은 밤이 새도록 토론을 거듭하였다. 11월 초순이면 지린 지방은 벌써 눈이 덮이고 강추위가 몰아치는 계절이다. 청년들은 추위 따위는 아랑곳 없이 이날 밤 의열단의 활동지침으로 공약 10조를 결정하고, 구축왜노(驅逐倭奴)ㆍ광복조국ㆍ타파계급ㆍ평균지권(平均地權)의 4개 항목을 최고의 이상으로 내걸었다.
의열단의 명칭은 김원봉의 작품이다. ‘정의’의 ‘의(義)’와 ‘맹렬’의 ‘열(烈)’을 취하여, ‘의열단’이라 명명한 것이다. 이날 창단식에 참석한 사람은 김원봉을 포함하여 13명이었다. 그런데 기록에 따라서는 참석자 중에는 몇 사람의 차이가 있다. 다음은 김원봉이 제시한 명단이다.
윤세주(尹世冑)ㆍ이성우(李成宇)ㆍ곽경(郭敬 : 일명 곽재기), 강세우(姜世宇)ㆍ이종암(李鍾岩)ㆍ한봉근(韓鳳根)ㆍ한봉인(韓鳳仁)ㆍ김상윤(金相潤)ㆍ신철휴(申喆休)ㆍ배동선(裵東宣)ㆍ서상락(徐相洛) 외 1명
창립 단원들은 형제의 의를 맺고 ‘공약10조’로서 조직 기율을 정하였다. 김원봉이 맏형격인 ‘의백(義伯)’으로 선출되어 단장의 임무를 맡았다. 대표자의 명칭을 ‘의백’이라 하고 있음은 단원 상호간의 관계를 반(半) 혈연적 운명공동체 의식으로서 묶인 일종의 형제 결연적 관계로 상정하였음을 말해준다.
초겨울 대륙의 긴 밤이 어느새 밝았다. 새날은 11월 10일, 의열단이 정식 창단되는 날이다. 회의는 밤새도록 계속되고, 그 이튿날, 곧 1919년 11월 10일 새벽에 이르러, 후일 왜적들이 오직 그 이름만 들어도 공포하고 전율하던 의열단은 이에 완전한 결성을 보게 된 것이다. 이날 채택된 ‘공약10조’는 다음과 같다.
의열단 공약 10조
1. 천하의 정의의 사(事)를 맹렬히 실행하기로 함.
2. 조선의 독립과 세계의 평등을 위하여 신명(身命)을 희생하기로 함.
3. 충의의 기백과 희생의 정신이 확고한 자라야 단원이 됨.
4. 단의(團義)에 선(先)히 하고, 단원의 의(義)에 급히 함.
5. 의백(義伯) 일인을 선출하여 단체를 대표함.
6. 하시하지(何時何地 : 어느 때 어느 곳)에서나 매월 일차 씩 사정을 보고함.
7. 하시하지에서나 초회(招會)에 필응(必應)함.
8. 피사(被死)치 아니하여 단의에 진(盡)함.
9. 일(一)이 구(九)를 위하여, 구가 일을 위하여 헌신함.
10. 단의에 반배(返背)한 자를 처살(處殺)함.
의열단이 창단될 때 성문화된 단의 강령 같은 것은 달리 없었다. 1923년 단재 신채호의 손으로「조선혁명선언」(의열단선언)이 쓰여질 때까지 일제와 친일파를 몰아내고, 조국을 광복하여, 계급을 타파하며, 토지소유를 평등하게 한다는 4대 목표를 최대의 이상으로 삼았다. '평균지권’은 의열단의 진보적인 성향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 조항은 지주소작 관계가 더욱 강화되어 가고 있던 조선 국내 사정을 두고 볼 때 대단히 진보적인 것이었다. 요컨대 의열단은 단순한 독립만이 아니라 사회개혁을 지향했으며 대한광복회의 진보적 노선을 한층 더 발전시켰다고 할 수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다음은 의열단이 채택하여 적의 간담을 서늘하게 한 공포의 '마땅히 죽여야 할 대상' 즉 ‘7가살(七可殺)’이다.
7가살
(1) 조선총독 이하 고관.
(2) 군부 수뇌.
(3) 대만 총독.
(4) 매국적.
(5) 친일파 거두.
(6) 적의 밀정.
(7) 반민족적 토호열신 (土豪劣紳 : 악덕 지방유지).
의열단은 ‘7가살’과 함께 5가지의 ‘파괴대상’도 선정하였다.
5파괴 대상
(1) 조선총독부.
(2) 동양척식회사.
(3) 매일신보사.
(4) 각 경찰서.
(5) 기타 외적 중요기관.
의열단은 ‘7가살’과 ‘5파괴’를 명시적으로 규정하였다. 처단 대상을 명확히 함으로써 활동목표를 적시한 것이다. 총독 정치의 우두머리와 하수인 그리고 민족반역자 모두를 세분화해서 구체적으로 ‘마땅히 죽여야 할 대상’으로 지목하였다. 또 파괴해야 할 핵심기관으로, 통치기관은 조선총독부, 수탈기관으로는 동양척식회사, 선전기관은 매일신보사, 폭압기구는 각 경찰서와 기타 중요기관을 적시하였다. 이는 의열단이 어느 독립운동단체보다 격렬하게 일제와 싸우고자 하는 결의, 치열함과 조선민중의 소망을 담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단정 반대, 미군정 경찰에 쫓겨
망명 28년만에 환국한 김원봉에게 분단된 조국은 ‘해방조국’이 아니었다. 미군정하에서 1946년 이승만의 ‘정읍발언’은 정국의 갈림길에서 하나의 분수령이 되었다. 이를 계기로 좌우합작운동이 거세게 제기되었다. 일부 우파와 중도파 좌익세력은 이승만을 중심으로 하는 일부 우익세력의 단독정부 수립계획이 본격화되자, 이를 저지하기 위해 좌우합작운동을 전개하였다.
미군정은 초기에는 모스크바 3상회의의 결정에 따라 반탁을 주장하는 극우세력을 배제하고 중간파 중심으로 미국에 우호적인 정부를 세우려는 구상하에 좌우합작운동을 지원하였다. 그러나 미국의 한반도 정책이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쪽으로 전환됨에 따라 좌우합작운동은 시련에 부딪히게 되었다. 김원봉은 줄곧 좌우합작운동을 지지하며 1948년에는 남북협상대표의 일원으로 방북길에 오른다. 김원봉은 이승만의 정읍발언을 비판하면서 좌우합작-통일정부수립의 의지를 분명히 하였다. 특히 합작운동에 앞장서고 있는 김규식과 자주 만나고, 이를 지원하였다.
민족혁명당은 1947년 6월에 열린 제10차 전당대회에서 당명을 인민공화당으로 변경하고, 신탁통치 지지라는 정치노선을 확정하였다. 김원봉은 당대표의 직을 맡았다. 인민공화당의 주요 정치노선은, 각지 인민조직위원회 조직을 통한 임시정부 수립, 토지의 무상몰수ㆍ무상분배, 노동자ㆍ농민에 대한 선전활동 강화, 민전에 대한 지지 등이었다.
이해 7월 19일 해방정국의 주역 중의 한 사람인 여운형이 암살되었다. 민전의장인 김원봉은 추도사를 신문에 게재하고 그를 추모하였다. “정치적 주장이 다르다 하여 그것을 구실삼아 자기 민족의 지도자를 학살하는 이런 죄악은 천추에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의 죽음은 민족국가의 부흥발전에 큰 상처를 남기는 일”이라고 애통해 하였다.
김원봉은 8월 3일 거행된 여운형의 인민장 장례위원장을 맡아 장례식을 주관하였다. 여운형 장례식 행사가 김원봉이 남한에서 활동한 마지막 공개행사가 되었다. 김원봉은 8월 26일 트루먼 미국특사로 서울에 온 웨드마이어 중장 일행이 남한 정치지도자들을 면담하면서 그에게도 면담을 제의했지만, 신변위협과 더 이상 미국에 기대할 것이 없다는 이유로 이를 거부하였다.
이 무렵 미군정 경찰은 김원봉을 체포하기 위해 혈안이 되고 있었다. 8월 12일 새벽 4시에 그의 집에 경찰이 들이닥쳐 수색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김원봉은 이미 피신하고 없었다. 경찰이 김원봉을 비롯하여 좌파계열 인사들을 구속하려는 이유는, 이들이 8월 15일을 기해 기념대회를 가장하여 폭동을 일으켜 일시에 공산당정권을 수립하려 한다는 혐의를 씌웠다. “그러나 쇠퇴 일로에 있던 남로당이 일시에 공산당 정권을 세우려 하였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며 실제 이 음모와 관련하여 체포된 좌익 거물급 인물들은 대부분 석방되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공산당정권 수립’ 주장은 별로 신빙성이 없어 보인다.
이 무렵 김원봉은 대단히 긴장된 상태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김원봉의 긴장된 나날을 시사해주는 기록이 있다.『시카고선』지의 마크게인이 1946년 10월 17일 '먼지 투성이의 도로와 불결한 골목을 지나 한 이층 건물'을 찾아갔을 때 약산은 '얼룩이 져 있는 흰 벽의 어떤 장식도 없는 넓은 이층 방'에서 허헌 등과 함께 회의 중이었다. 기자의 첫 눈에 '준엄한 얼굴과 놀랍도록 튼튼한 목과 어깨를 가진' 모습의 약산은 자신을 ‘직업혁명가’로 소개하였다. 이날 면담에서 약산은 '자기의 은신처를 떠난 사람은 누구나 발각되는 대로 체포'하는, 미군정의 좌파진영에 대한 탄압정책을 지적하였다.
김원봉은 남쪽에서 거의 설 땅이 없어져 갔다. 1948년이 되면서 정국은 더욱 급물살을 타고 있었다.
해방 3년차를 맞은 정국의 주요 흐름을 살펴본다.
1월 7일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이 입국하였다. 한 달 뒤에 단정 반대와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을 거부하는 총파업과 시위가 발생하였다. 2월 10일에는 김구가 단정수립에 반대하여「삼천만 동포에게 읍고함」이라는 성명을 발표한데 이어 남북협상을 제기하였다.
이에 따라 김구와 김규식이 북측의 김일성ㆍ김두봉에게 남북요인 회담을 제의하는 한편, 유엔한국위원단에 남북협상방안을 제시하였다. 김구의 성명은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는 내용을 담았다.
남한 인사들의 요인회담 제의에 북한 측은 남북 정당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 개최를 제의하였다. 미군정청과 남한 일부 우익단체들이 김구 일행의 북행을 반대하는 시위를 벌였다. 2월 19일 유엔한국위원회 제2분과위원회는 하지 중장에게 허헌ㆍ김원봉 등이 자유롭게 회견할 수 있도록 이들의 신변보장을 요구하였다. 하지는 공보 제31호로서, 남한폭동 선동죄로 수색 중인 허헌에 대하여 28일까지 체포를 보류하는 한편, 김원봉 등은 체포령을 내릴 의도가 없다고 밝혔다.
하지의 이와 같은 공개 성명에도 불구하고 좌익계열 지도자들은 여전히 위협을 느껴야 했고, 공개장소에 나서기 어렵게 되었다. 이승만과 한민당 등 분단세력이 단독정부 수립을 기정사실화하고 총선거 준비를 서두르고 있었고, 제주에서는 이에 반대하는 대대적인 제주 4ㆍ3항쟁이 발발하였다. 이후 계속된 4ㆍ3항쟁으로 무고한 3만명에 이르는 도민이 희생되었다.
김원봉은 남한의 단독정부 수립이 기정사실화되고, 신변에 대한 위협이 가중되면서 월북을 결심하고 4월 9일 가족과 함께 38선을 넘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3ㆍ8선을 넘나드는 것은 비교적 자유스러워서 월북에 별다른 장애는 없었던 것 같다. 미군정경찰의 감시만 피하면 되었다.
월북 동기와 배경
김원봉의 월북 또는 북한체류와 관련해서는 몇 가지 이유가 제시된다.
첫째, 신변의 위협이다. 거듭되는 백색테러의 위협에 불안을 느끼게 되었다. 이미 몇 곳에 비밀 은신처를 두고, 수시로 옮겨다니면서 활동하고 있었지만, 경찰의 감시망과 테러에 대한 위협은 날로 가중되었다.
둘째, 정치상황의 변화이다. 해방정국은 미국이 단독선거를 통해 남한에서 친미정권을 세우려는 정책이 확고해지면서 중간-좌파세력의 정치적 입지가 없어졌다. 김원봉은 더 이상 남한에서 정치적 활동공간을 확보하기가 어려웠다.
셋째, 1947년 8월 12일 새벽 미군정경찰이 서울 수표동 소재 김원봉의 자택을 수색하는 등, 우익 백색테러와 함께 군정경찰에 의한 검거 위협이 날로 심해지고 있었다. 이때 미군정 경찰의 체포령이 내려졌다.
넷째, 비슷한 시기에 남로당과 민전 산하단체에 대한 폐쇄조처와 대대적인 검거 선풍이 일어났다. 허헌을 비롯하여 좌파인물 10인에 대한 검거령이 내려졌다.
다섯째, 당시 북한에는 김원봉의 예전 동지들인 조선의용대(군) 옌안파 인물들이 정치적 기반을 잡고 있었다. 이들과는 비록 중국공산당 의 분리정책으로 옌안과 충칭으로 갈라지기는 했지만 동지적 유대감은 바뀌지 않았던 것이다. 남한에서 정치적 공간을 잃어가던 처지에서 옌안파 동지들이 건재한 북한을 택했을 가능성이다.
여섯째, 북한정권에서 실세로 활동 중인 최용건과 관련설이다. 최용건은 운남강무학교를 졸업하고 황포군관학교 교관을 거쳐 광저우봉기에 참여하였다. 황포군관학교 시절에 김원봉과 교우가 있었을 것이고, 이후 최용건은 동북항일연군의 지휘관으로 일제와 싸웠다. 최용건은 북한 정권이 수립되면서 부수상 겸 민족보위상을 맡는 등 2인자의 위치에 있었다. 이런 최용건과의 관계로 김원봉이 북한을 택하게 되는데 일정한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학병으로 끌려갔다가 해방을 맞아 상해에서 약산과 첫 대면한 뒤 귀국 후 6개월 여 동안 약산을 가까이에서 지켜보았던 황용주(전 MBC 사장)는 김원봉의 북행 인을 나름대로 다음과 같이 추측했다. “약산은 결코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었다. 또 그는 김일성의 항일투쟁은 전혀 인정하지 않는다는 말을 하곤했다. 그러나 이같은 성향의 약산이 북행한 것은 민전이 흐지부지되고 좌우합작이 실패한데 대한 실망에다 자기를 따르던 단원들이 거의 북쪽으로 돌아서버린 점에 따른 동요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던 것으로 보이며 여러가지 어려운 국내 정황 에서 취할 수 있었던 불가피한 선택이었던 것 같다.”
김원봉의 월북은 이상에서 열거한 여러 가지 이유가 조건과 배경이 되고 복합적으로 작용하였을 것이다. 충칭시절 김원봉의 비서였던 사마로는 자서전에서 자신이 상하이에서 “북한으로 가지말라”는 서한에 대해 “북한은 그리 가고 싶지 않은 곳이지만 남한의 정세가 매우 나쁘고 심지어 나를 위협하여 살 수가 없어 시골로 거처를 옮겼다.”고 답신한 것으로 보아 "신변위협’이 가장 큰 이유였던 것 같다"라고 썼다.
유석현ㆍ김승곤 등 의열단 출신과 독립운동가 이강훈 등은 한결같이 미군정경찰에 의한 신변위협을 월북동기로 인식한다. 김규식의 비서로 북한에서 열린 연석회의에도 참가한 송남헌은 “(장택상이 그의 부친 문제로) 불만을 가지고 그를 비롯한 진보적 해외지도자들-장건상, 김성숙 등을 수도청에 구금한 것이 직접 원인이었던 것 같다. 이에 신변의 위험을 느끼고 월북한 것 같다.”는 주장에도 설득력이 담긴다.
이와는 달리 약산 개인의 동기가 아니라 민전의 입장에서 살펴야 한다는 주장도 따른다. 그는 민전 의장이라는 좌익 최고위급 간부의 한사람으로서 적어도 1947년 8ㆍ15까지는 미소공위 재개 및 성사를 위한 대중투쟁을 가장 앞장서서 이끌었던 사람이다.
미소공위 결렬 후 민전은 남한단독정부 수립반대 투쟁에 온 힘을 기울이게 되고 이때 민전은 남한의 좌익, 나아가 중간파 세력과 북한의 좌익을 엮는 일에 매진하게 되었으며 그 성과가 남북협상회의였던 것이다. 그러나 민전은 남한에 단독정부가 수립되면 북한정부에 참여한다는 방침도 아울러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약산은 이같은 민전의 노선에 충실히 따랐고 북한 잔류도 그 같은 관점에서 봐야 할 것이다.
풀리지 않는 ‘퇴장’의 진실
김원봉은 6ㆍ25전쟁 후 평양에서 월북 또는 납북 독립운동가들과 ‘재북평화통일촉진회’를 만들어 활동했다. 이런 일들이 화근이 되었던 것일까, 아니면 김일성 유일체제로 가는 길목에서 필연적으로 잠재적 라이벌이었던 김원봉이 겪게 되는 운명이었을까. 김일성정부는 1956년 8월 김두봉-최창익 등 북조선노동당의 옌안파 인물들을 반당 반혁명분자로 지목하여 대대적으로 숙청하였다. 이들은 이념적으로나 북한정권 수립에 대한 공로로 보아 동지들이었다. 그럼에도 숙청되었다. 이제 서서히 김원봉의 차례가 다가오고 있었다.
김원봉이 노동상에서 해임된 것은 1957년 9월이다. 그렇지만 조국통일민주주의 민족전선중앙위원회 상무위원과 최고인민회의 2기 대의원, 그리고 1958년 10월경까지 최고인민회의 2기 상임위원회 부위원장을 역임한 것으로 북한의 자료는 전하고 있다. 이해 3월에는 북한정부에서 노력훈장을 받기도 하였다.
이후 북한의 공식문건(신문 포함)에서 김원봉의 이름은 사라졌다. 월북 또는 납북 인사들의 소식을 전하는 신경완의 증언에서도 1958년 9월 9일 조소앙의 사망 때에 조문을 갔다는 것을 끝으로 그의 이름이 사라졌다.
김원봉이 숙청된 것은 1958년 12월~이듬해 1월에 걸쳐 30여 명의 저명한 남한 출신들이 제거되었다. 자료에 의하면, 이들은 적들과 직-간접으로 접촉하면서, 제국주의 수정주의자들과 손잡고 통일에 대한 대가로, 한국의 중립화를 받아들이려 계획한 다수의 반혁명 종파분자들로 몰려서 숙청당한 듯하다. 그의 퇴장은 정치적 사형을 의미하며, 이는 통일전선의 상징적 존재였던 그가 권력의 소모품으로 전락했음을 뜻한다.
김원봉의 ‘퇴장’과 관련해서는 확인되지 않은 몇 가지 설이 제기된다.
첫째는 숙청설이다. 스칼로피노와 이정식은 정확한 출처를 밝히지 않은 채 숙청설을 제기한다.
상임위원(최고인민회의-필자) 21명 중 4명(김원봉, 강양욱, 성주식, 이만규)은 군사정당의 대표자였는데 인민공화당의 김원봉과 성주식은 1958년 12월 ‘국제간첩’이란 죄목으로 숙청되었다. 조선민주당 대표인 강양욱은 김일성의 외척으로 영화를 누렸고 근로인민당 출신인 이만규는 계속 살아남을 수 있었다. 따라서 이 부류에서는 절반이 희생되었다.
두 번째는 은퇴설이다. 1958년 9월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에서 해임되어 공직에서 물러나게 되었다는 주장이다. “58년 3월 탄생 60주년을 맞이해서는 노력훈장을 수여받았다는 말이 있고, 김원봉 자신이 분파투쟁에 직접 관여한 형적은 별로 없어 일응 명예로운 퇴진의 모양은 갖추어졌을 것으로 볼 수도 있다. 단지 은퇴 후의 김원봉의 소식은 전혀 전해지고 있지 않다.”
세 번째는 자살설이다. 조선의용대 출신인 옌변의 작가 김학철은 옥중에서 자결했다고 증언한다. “독립동지회장 김승곤 씨는 지난 9월 (1989년-필자) 한민족체육대회 때 중국동포선수단의 한 사람으로 옌변으로부터 잠시 고국에 돌아왔던 독립운동가 출신의 작가 김학철 씨로부터 들은 그의 최후를 전해준다. 약산은 그때 장제스의 스파이로 몰려 수감됐다가 옥중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것이다.”
사실의 왜곡과 실체
최근 김원봉에 대한 서훈과 관련 재평가운동이 전개되면서 보수언론과 보수정치세력이 그의 월북 이후의 행적과 관련 거세게 비난하고 있다.
김원봉은 북한에서 국가검열상과 로동상, 무임소상, 최고인민위원회 상임위원회 부위원장 등을 지냈으나 모두 권력 실세와는 거리가 먼 위치였다. 그는 끝까지 조선노동당에 가입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진다. 최근 정창현 평화경제연구소장이 발굴한 자료〈푸자노프 일지〉(1958.10. 27)에 따르면 “김달현(천도교 청우당 대표)은 미국인들과 연결돼 있고 최근 체포 직전에 남쪽으로 도주하고자 온갖 방법을 사용한 전 최고회의인민회의 부위원장 김원봉(현재 체포돼 있음)과 교류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푸자노프 일지>는 평양 주재 소련 대사였던 알렉산더 푸자노프가 일기 형식으로 북한 정계 동향을 기록한 것이다. 그는 평양 주재 당시 당ㆍ군ㆍ정의 고위 간부들을 자주 만나 북한 내부사정을 청취하고, 그 내용을 본국에 보고하는 한편, 일기 형식의 기록으로 남겼다. 1950년대 북한과 소련의 관계에서, 특히 평양주재 소련 대사의 위상으로 보아 근거없는 정보를 청취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정창현 소장에 따르면 김원봉은 1958년 9월 중순 청우당 당수인 김달현 숙청 때 함께 숙청당한 것으로 분석한다. 다음은 1958년 10월 1일자〈푸자노프 일지〉의 내용이다.
최고인민회의 정기회의에 참석하였다.(…)회의에서는 상(각료ㅡ필자)들의 이동에 대한 정령과 옛 중앙통신사 사장 박무, 옛 강원도인민위원회 위원장 문태화, 최고인민위원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 김원봉(남조선인민공화당 위원장) 등을 반국가적 및 반혁명적 책동의 죄를 물어, 그들의 대의원 전환을 박탈한다는 정령을 비준하였다.
김원봉은 이후 북한사회의 공식문서나 언론에서 자취를 감추게 되고, 납북ㆍ월북 독립운동가들이 묻힌 평양 양미리의 애국열사능에도 묻히지 못하였다.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 누구보다 가장 강력하고 치열하게 싸웠던 김원봉은 일제가 가장 두려워했던 인물이다. 해서 그의 목에는 가장 많은 현상금이 붙었고, ‘현장사살’의 명령까지 내려졌다. 일본 외무상은 “김원봉 체포 시 즉각 사살하거나 나가사키 형무소로 이송할 것이며, 경비는 얼마든지 외무성에서 직접 지출할 것”이라는 훈령을 상하이 총영사관에 보냈다.
그가 이끌었던 의열단은 7년 동안 전후 23차례의 거사를 통해 일제와 친일파들의 간담을 서늘케 하고 한민족의 자존과 독립정신을 내외에 과시했다. 조선의용대(군)가 갈려져 다수가 공산당 진영인 옌안으로 향할 때 그는 소수 대원과 함께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찾아 광복군 창설에 기여했다. 그리고 광복군 부사령 겸 제1지대장이 되었다.
해방 후 환국하여 노덕술과 같은 일제경찰 출신의 쓰레기들에게 수모를 당하고 몇 차례 테러위기도 겪었다. “북한은 그리 가고 싶지 않은 곳이지만, 남한의 정세가 너무 나쁘고 심지어 나를 위협하여 살 수가 없다”면서 ‘살기 위해 죽을 곳’으로 가야했다.
우리나라의〈독립유공자 예우에 관한 법률〉은 “1945년 8월 14일까지 국내외에서 일제의 국권침탈에 반대하거나 독립운동을 위해 일제에 항거한 사실이 있는 자”에게 합당한 예우를 하도록 하고 있다. 김원봉이 ‘독립운동을 위해 일제에 항거’한 사람에서 빠진다면 과연 법정신이 살아있다고 할 수 있겠는가.
일부 정치인과 언론이 약산을 '6ㆍ25의 원흉', '6ㆍ25남침의 핵심역할' 등으로 몰아치고 있는 것은 사실과는 거리가 멀다. 그는 당시 당이나 군, 정부의 실권에서 밀려나 명목상 한직인 국가검열상이었다. 또 “전쟁 시 국군을 많이 죽여 훈장을 받았다”는 그들의 주장 역시 허구에 불과하다. 1952년 3월 19일 공훈을 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국가훈장 1급 최고훈장’이 아니라, 김원봉이 1951년 북조선 군사위원회 평북도 전권대표 재직 시 평북지역의 보리파종 실적이 우수하다고, 인민회의 상임위원장 김두봉이 준 ‘로력훈장’이다.
북한 통치 이데올로기 주체사상의 최고 이론가로서 주체사상을 해외에 전파한 외교가이고, 북한노동당 중앙위원, 최고인민회의의장, 주체사상연구소장, 노동당비서, 노동당국제담당비서, 최고인민회의 외교위원회 위원장 등을 역임한 황장엽이 1997년 대한민국으로 망명하였다.
한때 북한권력 서열 13위에 오를 정도로 핵심적 권력층이었다. 당시 이명박 정부는 국가정보원 통일정책연구소 이사장, 국가안보정책연구소 상임고문, 전주대학 석좌교수 등 예우를 하고, 이명박 정부는 2010년 그가 사망하자 1등급 훈장인 무궁화장을 추서했다. 김영삼 전대통령이 장례위원장을 맡고 유해는 대전현충원에 안장되었다. 독립운동은커녕 그 근처에도 얼씬거리지 않았던 주체사상가 황장엽에 대한 최상의 예우였다.
독립정쟁의 영웅 김원봉은 용납할 수 없는 공산주의자이고, 주체사상가 황장엽은 무궁화장을 받은 애국자로 추앙하는 사람들의 정신상태는 건전한가, 묻고 싶다.
일제강점기 가장 치열하게 일제와 싸웠던 김원봉 선생이 저승에서 일본이 재침략 야수성을 드러내고, 조국광복 74주년이 되는 오늘까지 자신에 대해 온갖 험담을 쏟아내는 사람들에게 어떤 심경일까. 러시아 혁명시인 마야꼽스끼(1893~1930)의 싯구와 같지 않을까 싶다.
나는 원한다.
조국이 날 이해하게 되길
조국이 원치 않는다면
그땐…
그냥 조국을 지나가는 수밖에
비스듬히 내리는 비처럼!
안중근 의거와 동양평화론
전우용(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1. 1895년 을미의병을 일으킨 유인석은 의리를 아는 식자(識者)가 ‘만고소무지대변(萬古所無之大變)’에 대처하는 방안을 세 가지로 압축해 제시했다. 첫째는 거의소청(擧義掃淸)이니 의를 행하여 변란을 일으킨 무리를 쓸어버리는 것이며, 둘째는 거지수구(去之守舊)니 변고가 미치지 않는 곳으로 떠나 구법(舊法)을 지키는 것이고, 셋째는 자정치명(自靖致命)이니 불의에 발을 담그지 않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이다. 오늘날 기준으로는 첫째가 의사(義士), 둘째가 지사(志士), 셋째가 열사(烈士)에 해당한다. 나라가 망해가던 시절 의병(義兵)에 투신했던 사람 모두가 의사이지만, 대한제국 의병 참모중장 자격으로 한국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척살한 안중근 의사는 특히 많은 사람의 추앙과 숭모(崇慕)를 받아 왔다. 이토를 척살했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가 표방한 명분이 시대의 대의(大義)에 부합했기 때문이다.
2. 안중근 의사는 이토를 척살한 이유를 다음 15가지로 제시했다.
1) 한국의 민황후를 시해한 죄
2) 한국 황제를 폐위시킨 죄
3) 5조약과 7조약을 강제로 체결한 죄
4) 무고한 한국인들을 학살한 죄
5) 정권을 강제로 빼앗은 죄
6) 철도 광산과 산림 천택을 강제로 빼앗은 죄
7) 제일은행권 지폐를 강제로 사용한 죄
8) 군대를 해산시킨 죄
9) 교육을 방해한 죄
10) 한국인의 외국 유학을 금지시킨 죄
11) 교과서를 압수하여 불태워 버린 죄
12) 한국인이 일본인의 보호를 받고자 한다고 세계를 속인 죄
13) 현재 한국과 일본 사이에 싸움이 그치지 않아 살육이 끊이지 않는데, 한국이 태평무사한 것처럼 위로 천황을 속인 죄
14) 동양 평화를 파괴한 죄
15) 일본 천황 폐하의 아버지인 태황제를 시해한 죄
3. 안중근은 김구, 안창호, 박은식, 이상설 등 당대의 독립운동 지도자들과 교유하며 식견을 넓혔다. 그가 이토의 죄로 규정한 것들 중 상당수는 당대 계몽운동의 논리, 즉 교육과 산업의 육성을 통한 자주 자강론에 닿아 있다. 그 자신도 직접 두 학교를 설립한 바 있다. 그는 당대의 시대 사조였던 사회진화론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사회진화론은 찰스 다윈의 진화론을 사회과학 이론으로 재정립한 제국주의 침략 정당화 이론이었다. 동물 세계에서 관찰되는 우승열패, 적자생존, 약육강식의 원리가 인간 세계에도 일반적으로 관철된다고 주장하는 사회진화론에 따르면, 승패(勝敗)는 곧 강약(强弱)의 결과이다. 약자가 강자에게 멸망하거나 지배당하는 것은 순리(順理)였다. 을사늑약 이후 계몽운동에 투신했던 지식인들 대다수가 이 논리를 극복하지 못하고 일제의 한국 강점 이후 정신적 무기력 상태에 빠져 들었다. 그러나 안중근은 이 논리에 매몰되지 않았다. 신채호나 박은식이 국가 대신 민족을 역사 발전의 주체로 설정함으로써 패배 의식을 극복했다면, 안중근은 ‘평화’를 중심으로 자기 사상을 재구축했다.
4. 안중근은 여순 옥중에서 자기 일생을 정리한 <안응칠 역사>를 정리한 뒤, 곧바로 <동양평화론> 집필에 착수했다. 그가 이토 척살의 이유로 든 15가지 중 가장 중요한 것이 ‘동양 평화를 파괴한 죄’라고 보았기 때문일 터이다.
사실 ‘동양’은 일본인들이 상상으로 만든 권역이었다. 우리말로는 모두 바다이지만 해(海)는 건널 수 있는 바다를 의미하며 양(洋)은 건널 수 없는 바다, 즉 땅 끝을 의미한다. 중국인들이 동양과 서양을 나누어 보기 시작한 것은 기원후 13세기 무렵부터의 일인데, 세계에 대한 지식이 확장됨에 따라 그 구분선도 여러 차례 바뀌었으나 동양과 서양을 나누는 기준은 언제나 중앙, 즉 중국이었다. 그들에게는 서역 너머에 있는 땅이 서양이었고, 동쪽 바다 건너편에 있는 땅이 동양이었다. 그들에게는 조선도 동양에 속했으나, 조선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중국적 화이관에서 ‘양’은 오랑캐의 땅이었다. 조선 사람들의 상상 안에서 동양은 중국 동남해안 동쪽에 있었다.
조선을 동양 제국의 일원으로 끌어들인 것은 일본이었다. 1876년 조일수호조규에 서명한 일본 전권대신 구로타 기요타카(黑田淸隆)는 조선과 일본이 아세아주 동양에 함께 있으니 서로 우의를 다지자는 내용의 서신을 첨부했다. 조선의 유교 지식인들에게는 이 내용이 분명 마뜩찮았을 것이나, 한국에 대한 일본의 영향력이 커지는 만큼 일본인들의 세계관이 지배하는 영역도 넓어졌다. 19세기 말부터 세계를 동양과 서양의 둘로 나누어 인식하고, 우리 스스로를 동양의 일원으로 배치하며, 서양과 대비하여 동양의 정체성을 재규정하는 태도가 일반화했다.
안중근 역시 이런 지리관과 함께 ‘서세동점’의 상황에 맞서 동양 3국이 연대해야 한다는 일본인들의 아시아주의를 수용했다. 그러나 일본인들이 자국 주도의 ‘아시아 연대’를 주창했던 반면, 안중근은 동양 3국 인민의 호혜 평등한 연대를 생각했다. 그는 한 중 일 동양 3국이 서양 세력에 맞서 연합군을 창설하고 공동 은행을 설립하며 교육 교류를 확대해야 한다고 설파했다. 그는 동양 3국인들이 민족 단위의 정체성은 유지하면서도 동양인으로서 공유하는 영역을 넓혀야, 서양 세력의 침략을 막아 내고 동양 내부의 평화를 이룰 수 있다고 보았다. 20세기 막바지에야 이루어졌던 EU 모델을 100년 쯤 전에 구상한 것이다. 그가 보기에, 이토는 한국인들의 마음속에 씻을 수 없는 치욕과 분노를 안겨 줌으로써 양 국민 간의 진정한 화합을 가로 막은 인물이었다. 그가 이토를 척살한 것은, ‘한국의 독립’을 넘어 ‘진정한 동양 평화’를 이루기 위해서였다.
5. 대한민국 헌법 전문은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삼일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 민주이념을 계승하고 조국의 민주 개혁과 평화적 통일의 사명에 입각하여 정의 인도와 동포애로써 민족적 단결을 공고히 하고...”로 시작한다. 정의 인도 동포애는 대한민국 헌법의 핵심 가치이다. 그런데 정의란 무엇이며, 인도란 또 무엇인가?
100년 전 기미독립선언서 공약삼장 첫 번째는 “금일 오인의 차거는 정의 인도 생존 존영을 위한 민족적 요구니...”로 시작했다. 정의와 인도는 3.1 정신의 요체이기도 했다. 여기에서 인도란 인간의 역사를 ‘동물 진화의 논리’로 설명하는 ‘사회진화론’에 반대하는 것을 의미했다. 그리고 정의란 바로 인도주의를 지키는 것이었다. 이보다 10년 앞서 안중근은 옥중에서 “견리사의(見利思義) 견위수명(見危授命)‘이라는 휘호를 남겼다. 그는 의병(義兵) 참모중장이자 의사(義士)였다. 그에게 정의란 동양 평화를 위해 한 중 일 삼국민이 평등하게 화합하는 것이었다. 세계를 인종 대 인종 간 경쟁의 무대로 생각한 점에서 사회진화론의 영향이 남아 있었지만, 그 세계를 평화롭게 유지하기 위해서는 ’호혜 평등한 관계‘가 맺어져야 한다고 보았던 점에서 ’인류 평등론‘에 근접했다.
’국가 간 약속이 인권 위에 있을 수는 없다‘는 한국 대법원의 판결을 문제 삼아 일본 정부가 도발한 지금, 안중근 의사의 <동양평화론>은 인류에게는 평화가 정의이며, 그 평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평등한 관계‘를 맺어야 한다는 사실을 일깨워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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