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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병의 성지, 농암장터
글 - 김병중
문경시민신문 기자 / ctn6333@hanmail.net입력 : 2024년 12월 31일(화) 1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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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경시민신문
1789년 <문경현지>에 따르면 임진왜란을 정점으로 고모령을 이용하는 사람들이 점차 많아지면서 고개 양쪽으로 농바우장과 송면장이 섰다. 이는 지역 시장이 15세기 말부터 서서히 열리기 시작해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좀 더 활발하게 형성되기 시작했고, 숙종조를 전후해서는 정치와 군사적인 요충지를 중심으로 열리던 것이 점점 산간 계곡까지 확대되는 추세를 보였다.

1823년 <임원경제지>에 따르면 당시 문경지방의 장시에는 쌀, 보리, 콩, 밀, 기름, 삼, 검은 차조기, 면포, 삼베, 생선, 소금, 곶감, 호도, 담배, 소, 사기그릇, 옹기 등이 거래되었다고 적고 있다. 이 무렵 농바우장은 인근 함창, 은척, 괴산, 가은, 화북 등의 주민과 상인들이 모두 이용할 정도로 규모가 컸는데, 농바우 인근지역에는 가내수공업도 발달했다. 사현리 사기막 마을의 사기, 내서리, 궁기리의 일상생활 도구 중심의 목기, 갈동리의 한지 제조, 화산리 귀밑 보뚝거리의 유기 제조 등 많은 가내 수공업이 번성하였다.

당시 고모령을 넘나드는 길손과 상인들의 통행이 만만치 않았으므로, 이 고개 주변으로는 1930대까지만 해도 막걸리와 산채 비빔밥을 파는 주막집들이 많아 해 질 무렵에는 문전성시를 이루게 되었다. 곶감장수, 소장수, 소금장수 등의 행렬이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라고 했으니 어떤 풍경이며, 어느 정도 규모였는지 어렴풋이 가늠이 된다. 이에 따라 5, 10일에 열리는 농바우 5일장에도 영향을 주어 이 지역 시장 발전의 큰 힘이 되었다.

시장은 대부분 면사무소, 지서 등 관공서 있는 곳과 가까이 소재하고 있어 시장이 갖는 힘은 행정력, 정보력, 소통력, 경제력 같은 차별화된 가치와 다른 지역에 비해 더 발전의 기회를 가지므로 쉽게 옮길 수 없다. 누가 자신들이 누리고 있는 특권을 쉽게 내려놓고 물러서겠는가. 예전 장터 사람들은 그 나름의 텃새를 갖고 있으면서 좀 깨어있다는 인식이 있었다면, 상대적으로 서재 다락골이나 고모령 이터골 사람들에 대해서는 무언가 깔보는 시선을 가지고 있었으니 얼마나 말도 안되는 우스꽝스런 일인가. 그것은 주로 정보력과 소통력 부족을 얕잡아본 행태에서 기인되는 것으로, 그냥 턱없이 아무것도 모르는 촌놈이라고 매도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장 부근에 사는 사람들을 장돌뱅이라고 놀리거나 깍쟁이로 취급하기도 했으니 이렇게 본다면 서로 상계될 만한 내인성 오류를 갖는다.

농암은 시장이 생긴 이래 장터를 두 번씩이나 옮겼으니 결국 시장이 섰던 장소는 3곳인 셈이다. 농바우 장터(개바우, 괴정 부근)와 농암 구장터(농암1리), 그리고 농암 신장터(농암2리)로 옮겨졌는데, 왜 이처럼 장을 여러 번 옮기게 되었는지 그 이유를 알아보는 것은 농암지역 역사를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여기서 먼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농암(籠巖)>이라는 지명에 관하여다. 농암의 한자는 장롱을 뜻하는 ‘농(籠)’과 바위를 뜻하는 ‘암(巖 : 岩의 속자)’이다. 1914년 일제 치하 행정구역 개편시 바위가 쪼개지며 견훤이 태어났다는 전설을 가진 <농바우>라는 뜻을 담아 농암이라 부르게 된다. 견훤의 전설이 서린 바위의 이름을 따서 면의 이름으로 작명한 것은 견훤이 이곳에서 태어나 성장했다는 또 다른 입증으로, 농암이라는 지명은 곧 <견훤이 태어난 바위>라는 뜻을 내포한 것이다. 초기 공적인 기록문서나 지도에는 ‘용암(龍巖)’으로도 나타나는데, 그것은 이곳에 이름난 쌍용(雙龍)이라는 승경이 있어 농(籠)을 용(龍)이라 오인한 것으로 보인다.

한편 농암면의 전신인 <가서면(加西面)>은 지금의 괴산군 청천면 삼송리에 있는 송상리(삼송1리) 송중리(삼송2리), 송하리(삼송3, 4리)를 포함, 고려 공양왕 때부터 1963.1.1.까지 무려 574년 동안이나 한 지역으로 있었다. 송하리에는 장롱처럼 생긴 다산(多産)의 전설이 유래하는 또 다른 <농바우(籠-)>와 견훤이 무술을 연마했다는 <마당바위>가 있다. 그러므로, 농암이라는 지명은 갈동의 농바우와 삼송의 농바우가 있는 지역 둘을 길게 하나로 이은 견훤 탄생과 성장기 역사를 내포 및 상징하는 특별한 이름이 된 것이다.

그러나 행정구역 개편 이전의 역사를 기록한 <청조향람>과 <문경지>에서 도암과 운강 의병장 출병 기록에서는 1895, 1896년임에도 <농암장터>나 <농암장날>이라는 말이 등장한다. 또한 1850년경 흘러들어와 장터의 머슴이 되었다는 서문경의 기록에서도 <농암천>과 <농암지역>이 나오므로 농암이라는 지명의 최초 사용에 대한 연대기에서 혼란이 생긴다. 하지만 편찬위에서 기록 편의상 <농암>으로 지칭한 것일 뿐, 서문경의 상석 뒷면에는 그를 일컬어 <농바우골의 수호신>이라 새겼는데, 이는 <농바우골>이 올바른 표기라는 입증이다.

김상건의 <대정지>와 <백치자연보>에도 1896년 운강의 밀정자 효수 광경을 바라보던 곳을 괴정마을 어귀인 <대정공원 초입>이라 적고 있고, 1883년 산송사건을 기록한 <윤하정>지에서도 가서면과 대정리가 나올 뿐 농암이라는 지명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결국 1910년 종곡2리에 <상주헌병대 헌병파견대(지서)> 설치 후, 1914년부터 <농암>이라는 행정지명 사용이 처음으로 확인된다. 이때부터 <장기리>는 농암1리, <가항리>는 농암2리로 바뀌었고, 관서명도 <농암면사무소>와 <농암분견소(지서)>로 개칭되었다. 이어 1921년 <농암국교>, 1939년 <농암우체국>이 생기면서 <농바우장>으로 불리던 시장 이름이 자연스럽게 <농암장>으로 바뀌게 된 것이다.

시장은 다중이 모여 상거래를 하는 공간이다. 하지만 각종 정보와 소식 등이 빠르게 전달되고 확대 재생산되어 사방으로 퍼져 나가는 역할을 하므로, 일제는 1914.9. 조선총독부령 제136호로 <시장규칙>을 제정 반포하면서 모든 시장을 허가 공영제로 통제해 나가기 시작한다. 이때 헌병파견대가 종곡2리에 설치된 것도 농암의 시장 형성과 무관하지 않으며, 같은 곳에 면사무소와 지서의 설치는 다중의 효율적 통제를 위한 일제 전략 중 하나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농바우장이 과연 어디서 열렸을까? <청조향람 181p.>에 의하면 “농암장이 농바우에서 열렸다는 전설이 있다.”고 하면서, “가실목과 청룡등, 동바리 등이 고모령의 성장에 의한 직접적인 영향을 적게 받았을 것이라.”적고 있다. 이것을 보면 당시 농바우시장은 고모령의 장시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을 뿐 아니라, 한양으로 통하는 길이 고모령에서 연천과 종곡리를 거쳐 갈동쪽으로 이어지고 농암면사무소와 지서가 종곡2리(뒷바리)에 소재했으니 이 동선의 어느 주요 교차 지점에 장시가 열렸을 것이다. 이로인해 가항리 쪽은 고모령 장시의 영향을 적게 받을 수밖에 없었다는 것으로 이해가 된다.

하지만 갈동리 <농바우들> 가운데 있는 농바우 바위 부근에서 5일장이 열렸다고 보긴 어렵다. 당시 논농사를 중히 여기던 때에 5일 마다 장시가 열리는 한때를 위해 농지를 포기한다는 건 이해 불가하고 위치로 봐도 교통의 접점이 아니기 때문이다. 농암은 산촌이지만 시장 거래 규모가 문경군에서 세 번째로 큰 장시로, 삼송과 궁기, 화북과 황령, 사현과 함창·은척, 가은과 마성 등 4곳의 길이 교차하는 곳에 큰 장이 서게 된다는 건 당연한 일이다. 그리고 고모령을 넘나들며 한양을 오가는 많은 사람들의 통행을 생각하면 그 시장은 쌍용천과 궁기천이 합류하고 4 지역의 길이 만나는 지금의 <농암로터리>가 있는 괴정 부근으로 비정된다.

농바우골은 정조 임금 때 이미 큰 장시가 섰다고 적고 있어, 그 이전인 임진왜란 무렵부터 선비들이 살기 좋은 곳을 찾아 이거해 오면서 농암에 마을이 형성되고 후에 장이 서게 된 것이다. 궁기천과 쌍용천이 합류해 농암천으로 흐르는 이곳은 다리가 없어 시장은 괴정 천변 쪽이 중심이 되어 열릴 수밖에 없다. 괴정과 장터를 잇는 <농암교>는 1939년, 괴정과 갈동을 잇는 <농바우다리>는 1963년에야 완공된 점을 감안한다면 예전엔 징검다리만 있고 현대식 다리가 없으므로 물 하나를 건너는 불편이 시장의 확장성을 저해했다는 추측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예전 괴정 도로변으로는 많은 상점이 있었는데, 가게와 주막, 담뱃집, 엿집, 기름집, 양말 가게, 금은방, 이발관, 미장원, 비료 창고 등이 연이어 있었다. 괴정 범바위 위쪽엔 면민 휴게소로 <진향루>가 세워져 있는 것을 보면 시장 위치가 어디쯤이었는지 어느 정도 정리가 된다.

시장은 이수(二水)의 합류 지점 3곳(괴정앞, 개바우앞, 갈동 낙수바우들 꽃비리 앞)으로는 갱변(강변의 문경사투리)이 비교적 넓고 길게 형성되었고, 괴정 갱변 둑으로는 느티나무 거목이 서 있었다. 그 나무는 정자나무 역할을 하기도 했고 일제 밀정자들의 목을 매단 나무로 추정이 된다. 기록에 의하면 도암과 운강 두 의병장이 거의 같은 시기에 거사를 치른 곳이 장터와 개바우이고, 농암 장날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처형을 했다는 것을 보면 장터의 위치가 더 확연해진다. 이는 달리 말해서 5일장이 길 쪽보다는 <강변장, 갱변장>으로 확대되어 섰다고 봄이 타당하다.

여기서 다시 생각해 봐야 할 것은 <농바우시장>이 열렸다는 전설이 있다는 점이다. 전설은 사실로 단정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무조건 무시할 수만 없다. 갈동리 농바우 마을의 <낙수바우들> 가운데는 천년된 느티나무가 보호수로 지정 관리되고 있는데, 이 나무는 <견훤느티나무>로 불리고 있다. 나무 아래는 견훤이 심었다는 내용의 비석이 서 있고 사람들이 이곳에 모여 행사와 잔치도 벌이고 휴식도 취하는 곳으로 많이 이용되어 오고 있다.

그러므로 단순히 오래된 느티나무 한 그루에 그치지 않고 그 나무 아래는 수많은 세월 속의 사람이 함께한 시간들이 두껍게 적층 되어 있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 물물교환을 하면 시장이 서고, 대화를 나누면 아고라 광장이 되는 것이다. 전설을 상기하며 견훤 느티나무를 연계시켜 보면 결국 백여 평 되는 나무 아래서 오랫동안 장시가 열렸다는 견해가 설득력을 얻는다. 갈동리에는 견훤 유적인 느티나무와 농같이 생긴 농바우와 말을 묻은 말무덤과 왕이 넘었다는 왕재(대범마)가 있고, 건너편 성재산엔 견훤산성 본성, 쪽금산에는 견훤산성 보조성이 있다는 점을 감안해보면 적어도 견훤의 활동시기 부터 이곳에 <견훤장터>가 열렸음을 추론할 수 있다.

1914년 이전에는 전혀 <농암>이란 명칭이 없고, 이 지역을 통칭하는 지명이 <농바우, 농바우골>이었기에 <농바우>는 갈동리 특정 장소를 의미하는 게 아니라 이 지역 전체를 그렇게 불러 <농바우시장>이란 이름도 이곳을 아우르는 시장 명칭으로 이해하면 여러 의문이 동시에 풀린다. 갈동리 농바우는 여러 길이 만나는 교차점도 아니고 논 가운데 장시가 열렸다는 것도 이해가 불가하며, 의병장들이 택한 효수와 의진 장소로도 숲과 나무가 있는 괴정 쪽이 더 적합하다. 다만 농바우 느티나무 아래서 견훤시대부터 장시가 섰을 것이라는 전설을 부정한다는 것은 다소 무리가 따르기 때문에 신라말 경 느티나무 밑 장시가 섰다고 인정한다면 별반 무리가 없을 법하다.

1939.2.15. 농암번영회(회장 김상건)가 출범되어 의연금 1,300원을 모금해 <농암교>를 건설하고, 1939.3.11. <농암우체국>과 이후 <보건소와 축산지소> 등이 농암1리에 건축된다. 1939.10. 종곡2리에 있던 헌병분견대를 <문경경찰서 농암주재소>로 개칭하고, <농암면사무소>와 같이 농암1리로 동시에 이전하면서 그동안 궁기천 옆으로 길게 치우쳐 형성되던 시장이 농암1리 우체국과 농암지서 쪽으로 서서히 옮겨지기 시작했다. 이는 행정기관의 신축과 이동 배치가 시장의 확대와 이전을 촉진하게 된 것이다. 이후 시장은 개바우쪽 우시장과 괴정부터 시작해 농암지서 쪽까지 반추형의 큰 시장이 형성되어 나갔다. 1950년 <청암중학교>가 개교 되고, 1960년 중반에는 시장 중심인 농암우체국 3거리에 <농암극장>이 2층으로 지어졌으며, 1974년에는 <청암고등학교>까지 개교됨으로서 시장이 전성기를 구가하게 된다. 이 장터는 농암1리와 종곡2리 뒷바리·괴정 사이를 흐르는 궁기천 개울을 중심으로 길게 자리를 잡아나갔고, 주막, 대장간, 옷가게, 문구점, 책방, 잡화점, 어물전, 금은방도 두 곳, 자전거 수리점 두 곳, 한약국 두 곳, 시장 아래쪽으로는 우시장과 대정공원이 자리했던 그때가 오일장다운 장이었다.

농암1리에서 시장이 자리를 잡아나가던 1960년 어느 해, 극심한 가뭄이 들었다. 모든 사람들이 하늘만 쳐다보면서 한숨만 내쉴 뿐 별다른 방도가 없었다. 그때 시장을 이전하여 장을 열면 비가 내린다면서 옛날 시장으로 옮겨 장시를 연다고 했다. 가뭄이 극심할 때 기우제의 일환으로 장의 위치를 이동하는데, 이를 <갱변장, 사시, 시장옮기기>라고도 했다. 농사를 주요 생업으로 하는 주민들이 모이는 곳이 시장이므로 계속되는 가뭄이 남의 일이 될 수는 없었다. 결국 시장 상인들과 농민들이 한마음이 되어 시장 위치를 옛 시장인 개바우와 괴정쪽 갱변으로 옮기고 용신을 자극하여 비를 내리도록 기원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 소란을 피우고 풍물패가 나서서 놀이판을 벌이며 청년들은 대정 숲에서 씨름판을 벌이기도 했는데, 그 뒤 다행히 하늘에서 비를 흠뻑 내려준 적이 있다.

그러나 1980.7.23. 대홍수가 발생해 농암1리 천변의 주택과 시장이 완전 폐허가 되는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대형 트럭이 몇 백미터를 떠내려 가고 강변의 집들은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었으며, 집이 있던 자리에는 바윗돌과 모래가 평탄 작업을 해 놓고 있었다. 이에 복구보다는 시장의 이전이 적극 검토되었고, 당국에서는 주민들의 중지를 모아 농암2리 가항리 논을 메워 다시 시장을 이전하게 된다. 당시 농암시장에는 곡물을 사고팔 때 그것을 됫박으로 계량해 주는 <되감고>가 있었고, 우시장에는 누런 완장을 찬 텁수룩한 <중계인>들이 소의 엉덩이를 두드리며 돈다발을 들고 흥정하던 것과 시장 진입 주요 지점에서 사람들이 이고 지고 오는 곡물 등을 길목 중간에서 좋은 값에 사겠다며 사재기하는 호객꾼들도 있었지만 지금은 다 사라진 풍경이다.

오일장은 전통과 문화를 느낄 수 있는 소중한 장소이다. 단순히 물건을 사고파는 곳이 아니라 소통의 장소가 된다. 사람들의 소통과 문화교류, 흥정의 재미와 생필품의 구입 등 교통이 발달하지 못했던 시대에 5일마다 한 번 열리는 장날은 특별한 날이자 전통문화의 전시장이다. 특히 농암시장은 다른 시장과는 달리 의병장들이 효수하고 의진을 치며 좋은 기운을 받고 출병을 시작하던 의병의 성지라는 특별한 역사성을 갖고 있다. 국난의 위기에서 구국 투쟁의 결의를 다지며 밀정을 처단하고 불타는 민족혼을 결집하여 전국으로 진군해 나갔던 기세등등한 의병 탄생지가 바로 농암장터였다.

전설에서 보듯 농암 구장터에 있는 개바우는 견훤과 상당히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 도발산 범바위에서 호랑이가 내려와 아기 견훤에게 젖을 먹이고 갔다는 것이 그렇고, 또 견훤이 원래 이(李)씨였으나 견(甄)씨로 바꾸고 혼란스러운 나라를 바로 세우고자 구국일념으로 출병을 나선 것이 그렇다. 그가 성을 바꾼 <견(犬)>은 신령한 개바우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이며, 자신이 “서쪽(西) 땅(土)으로 가서 왕궁(瓦)을 짓겠다”는 큰 뜻을 담아 <견(甄)>씨로 성을 정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흙을 불에 구워 질그릇을 빚어내듯 혁신적인 나라를 새로이 건국”하겠다는 의지를 담은 견(甄)은 왕의 성씨로 조금도 부족함이 없다. 진성여왕 시절 왕족과 귀족들의 사치가 극심했고 백성들이 무거운 조세와 부역이 가중되자 상주 사벌주에서 <원종과 애노의 난>이 발생하게 된다. 이를 본 견훤은 결국 자신이 자란 농바우골과 장수로 키워준 경주를 등지고 서남부지방으로 가서 세력을 결집, 892년 무진주를 정복하고, 900년 완산주에다 후백제를 세운 것이다.

임진왜란이 시작된 1592.4월 말경 중봉은 목숨 바칠 각오를 단단히 하고 어머니를 안전한 장소에 모신 후 거사를 벌이게 된다. 최후의 결전을 앞두고 어머니를 청주에서 가은 선유동으로 모신 다음 개바우를 지나 내서리 중산 진지에서 군사들을 결집한다. 이때 천문과 지리에 밝은 조헌이 개바우 앞을 지나며 그곳에서 영험한 기운을 받고자 머리숙여 기도를 올렸을 터이다. 그리고 1592.5.3. 중봉은 청주로 이동해 왜군에 맞서 싸우며 승전보를 울렸으나 안타깝게도 2차 금산전투에서 장렬히 전사하고 만다. 1896.3.28. 금산의진 이기찬 의병장은 군사를 이끌고 대정리 숲에 의진을 치게 된다. 그는 흐트러진 군사들을 재결집하며 영험한 개바우 정기를 받은 뒤 전열을 가다듬고 다시 출병하여 나라를 지켜나갔다.

이같이 깊은 역사를 가진 농암장터! 그 장터는 5일마다 서는 평범한 시장이 아니라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애국의 장터>다. 왜냐하면 독립을 외치던 장터는 매년 만세 운동 행사가 성대히 재현되는 데 비해 농암장터는 항일 의병 출병의 성지로서 위상이 절대적임에도 불구하고 게시판 하나 정도로 머물러 있기 때문에 이를 재조명해야 한다는 것이다. 만세운동은 태극기를 들고 하는 소극적인 무저항 운동이동이라면, 의병출병은 창을 들고 나가 목숨걸고 전투를 벌이는 적극적인 운동이다. 천안 <아우내장터>는 유관순으로 통하고, 김포 <오라니 장터>, 대전 <인동장터>, 익산 <솜리장터>, 음성 <한내장터> 등에서는 매년 기념행사와 함께 우렁찬 만세소리가 크게 들린다. 하지만 농암장터는 무너져가는 신라 대신 의롭고 강한 후백제를 건국하고, 임진왜란시 이 나라를 지키기 위해 왜군과 싸우기 위해 뜻을 결집한 장소인데다 구한말로 거슬러 올라가 왜군에 맞서 싸운 그 역사가 천년을 넘어서고 있으니, 이제는 <의병의 성지>, <의병장터>라 불러도 무방할 것이다.

그렇다면 <의병의 성지>인 농암장터는 왜 그동안 이렇게 묻혀 있었는가? 장터가 세 번 자리를 옮겨도 변치 않는 정신이 있으니 그것이 바로 애국정신이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겐 미래가 없다는 말을 잊고 바쁘게 살다 보니 무관심과 방관으로 이어져 온 건 아닌지 한번 돌아봐야 할 때다. 한 나라를 건국한 왕의 정기가 서린 곳, 임진왜란의 최고 의병장 조헌의 기운이 머문 곳, 그리고 구한말 신태식, 이강년, 이기찬 의병장의 기세가 사기충천하는 곳, 국난에 처하면 개바우가 울며 위험을 알려주는 농암장터의 역사는 오늘도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 하여 농암장터는 파란의 역사를 안고 연면히 맥을 이어온 우리 민족혼이 스민 <애국의 장터>라 부름이 타당하다 하겠다. 후세들은 이를 반드시 기리고 기억해야 할 소중한 의무가 있으므로, 적어도 일년에 하루를 정해 농암 의병의 장터에 모여 선열들의 얼을 되새기는 엄숙하고 뜻깊은 날을 보내야 할 것이다.
문경시민신문 기자  ctn6333@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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