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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고 넘는 고모령
글 - 김병중
문경시민신문 기자 / ctn6333@hanmail.net입력 : 2024년 09월 10일(화) 18: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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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경시민신문
고모령은 듣기만 해도 가슴이 저려오는 지명이다. 대중들의 마음을 크게 울린 <비내리는 고모령>이라는 노래에서 ‘어머님의 손을 놓고 돌아설 때엔 부엉새도 울었다오, 나도 울었소.’의 시작 부분 한 소절만 불러도 눈물이 그냥 주르르 흘러내린다. 그것은 한이 서린 애절한 가사와 함께 고모령에 전해오는 가슴 아픈 전설이 비애를 불러 눈물샘을 자극하기 때문이다.

일제가 남긴 피폐한 사회와 가난에 찌든 살림살이 때문에, 아니면 독립운동이나 정치적 이념 때문에 가족을 돌볼 수 없어 어머니와 이별할 수밖에 없었던 당시 세태의 정서를 쓴 노랫말이 많은 국민의 심금을 울린 것이다. 고모령 전설은 어머니와 자식, 고모와 질녀처럼 어른과 미청년이 같이 등장한다는 특징이 있다. 어머니와 흙을 쌓아 산을 이룬 형제와 남매 이야기, 독립운동에 연루되어 아들이 형무소에 수감되자 면회를 다니는 어머니와 형무소에서 어머니를 맞이하는 아들의 심정, 또는 고모가 어린 질녀의 죽음을 슬퍼하여 세상을 떠나고 마는 이야기 등 비극적인 요소가 주를 이룬다.

대구광역시 수성구 만촌동에 있는 작은 고개인 고모령(顧母嶺)은 어머니와 독립운동에 연루된 아들과의 면회를 마치고 돌아서는 심경을 시민들과 함께 해마다 기억하고 있다. 지자체에서 <고모령가요제>로 매년 무대에 올려 애국정신 고취와 절절한 가족 사랑의 시간을 갖는다. 반면 농암 궁기리에서 청천 삼송리로 넘어가는 고모령(姑母嶺) 고개는 인적이 끊긴지 오래되어 이제는 고개 이름마저도 우리 기억 속에서 서서히 지워져 가고 있다.

예전 영남 선비들이 과거시험을 보러 한양 갈 때 이용하던 길을 영남대로라 하여 상주에서 문경, 그리고 고개 하나를 넘어 충주(청주)를 지나 용인, 성남을 거쳐 서울로 입성했으며, 선비 대부분이 문경새재를 이용했다 한다. 그 이유는 과거시험 보러 가는 유생들이 추풍령을 넘으면 추풍낙엽처럼 떨어지고, 죽령을 넘으면 죽죽 미끄러지지만, 새재를 넘으면 새처럼 날아 넘어서 합격한다는 것이다. 게다가 경사스런 소식을 듣는다는 <문경(聞慶)>이라는 지명이 과거 급제라는 기쁜 소식으로 이어진다는 뜻으로 이해하여 이곳을 많이 이용했다는 속설도 있다. 그러나 기록에 의하면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관도로서 문경새재를 통하면 한양까지 열나흘 걸리고, 죽령 길은 보름, 추풍령 길은 열엿새가 걸렸다고 하니 그중 가장 빠른 새재 길을 넘게 된 것으로 보인다.

문경새재 1관문 입구에는 <옛길박물관>이 자리하고 있고, 삼국사기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길이라 불리는 문경 갈평에서 포암산 중허리로 넘어가는 <하늘재>가 있으니, 가히 문경은 유서 깊은 길의 도시라 할만하다. 하지만 추풍령, 죽령, 하늘재, 새재 말고도 한양으로 가는 편하고 빠르며 조용한 길이 있었는데 그 고개가 농암면 궁기리에서 청천면 삼송리로 넘어가는 <고모령(姑母嶺, 673m)>이다. 전설에 의하면 부모 없는 질녀를 데리고 고모가 조항산 밑에서 단란하게 살았는데, 질녀가 우연히 병을 얻어 죽게 되자 고모는 이를 애닯게 여겨 식음을 전폐하고 험준한 고모령에 올라 질녀의 이름을 부르며 며칠을 지내다 급기야는 그 자리에서 죽었다고 한다. 후세 사람들이 고모의 애처로운 넋을 위로하기 위해 ‘고모재, 고모치, 고모령, 웅현’이라고 불렀다 한다.

하지만 전해지는 지명 유래를 너무 정답처럼 단정할 필요는 없다. 고모재라고 하여 고모와 질녀만의 전설로 국한한다면, 고모(姑母)라는 한자표기가 古毛, 古母로 나타나지 않았을 터이고, 곰의 한자인 <웅(熊)>의 훈을 따서 <곰이 고모>로 연철 되는 과정을 거쳐 <웅현(熊峴)>이라고 까지 부르지 않았을 것이다. 고모령 재빼기에서 둔덕산 능선 쪽으로 공룡의 등같이 보이는 암봉이 <마고할미 통시바우>와 <손녀마고 통시바우>다. 이 바위는 전설 속 고모와 질녀에 대비되는 할미(존칭)와 손녀로, 천지 창조를 주관하는 다산의 여신 또는 인류의 어머니인 <마고신(麻姑神)>을 말한다. 마고는 주로 성을 쌓는 내기를 하거나 산을 옮기고 맨발로 바다를 건너는 거인이자 무소불위의 초인이며, ‘통시’는 변소의 사투리로 황금(富)과 해우(解憂)를 의미하는 기복의 대상이다. 마고의 ‘고’와 고모령의 ‘고’가 시어머니 ‘고(姑)’자인 점이 동일하고, 두 개의 바위가 고모재 마을의 수호신이자 진산 역할을 하기 때문에 길손들이 이 계곡으로 난 길을 택하는 것은 마고신의 보호와 축복을 받고자 함이었을 것이다.

이곳 조항산과 부근 지역은 견훤 출생과 성장지로 주목을 받았으나 후백제 패망 후 그를 따르던 많은 사람들은 다시 돌아오지 못하고 고려에게 탄압받아 이 지역이 침체되었을 것이다. 다행히도 왕조가 바뀌고 조선조에 고모령 길이 새로 열린 것은 다행이 아닐 수 없다. <괴산군청 홈페이지>에 이 고갯길은 “조선시대 영남지역 유생들이 과거시험 보러 한양 올라가던 길이었다. 험산 준령의 산속 길이었던 문경 새재길에 비해 통행이 잦았으며, 이 길을 통해 과거 길에 올랐던 유생들이 과거 시험에 등과하는 비율이 높았다고 구전되고 있으나 문경새재의 명성에 눌려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다”고 적고 있다.

고모령은 조항산과 둔덕산 사이에 자리하고 있으며, 백두대간으로 이웃한 갓바우재, 밀재, 버리기미재, 불란치재보다 넘기가 수월하고 한양으로 가는 고갯길 동선이 짧다는 장점도 있다. 새재는 산세가 험준한 데다 호랑이의 출몰도 잦았을 뿐 아니라 진남교 관갑천(토끼벼리)의 절벽이 매우 위험했고, 또 널리 알려진 길로는 도적들의 해코지와 탐관오리들의 시비도 만만치 않았으니 아리랑을 한 곡조 부르지 않고도 편하게 넘을 수 있는 고개가 바로 고모령이었던 것이다. 청천의 솔면삼거리는 상주와 괴산과 청천으로 가는 3갈래 길이고, 농암의 괴정 사거리는 궁기·연천길, 화북·황령길, 은척·함창길, 가은·문경길로 이어져 농암은 사통팔달의 교통이 가능하여 조선시대에도 큰 장이 서게 되었으니 자연히 고모령의 이용자가 적지 않았을 것이다.

1759년 <문경현지>에는 고모령로가 궁기천 계곡을 따라 청주로 가는 새로운 지름길이 개척되었고, 1789년에는 고모령 노변에는 농바우장과 송면장이 형성되었다고 적고 있다. 그리고 이 두 곳의 장시와 함께 고모령 계곡에는 많은 주막이 형성되었다.

“고갯길에는 <떡전거리>도 있었는데 이는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은 우리나라 최초의 무인 판매대이다. 조선시대 때 떡시루에 떡을 해서 이곳 떡전거리에 올려놓으면 지나가던 행인(대부분 한양으로 과거 보러 오가던 영남유생들)들이 쉬어가며 요기를 한 뒤 엽전을 놓고 가던 바위라고 했다.” 또한 고개 중간에 “<무제치>라는 곳은 심한 가뭄이 들면 이곳에 모여 돼지 등 제물을 차려 놓고 농악에 맞추어 춤을 추며 하늘에 제사를 올리는 행사가 삼국시대 때부터 지금까지 전해져오고 있으며, 지금도 바닥 암반은 당시 제물들의 선혈로 붉게 물들어 있어 보는 이들로 하여금 그동안 얼마나 많은 제물이 바쳐졌는지를 가늠할 수 있다.” 는 괴산군청의 기록이 있다.

그만큼 18세기 말부터 고모령로는 통행이 많았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고모령로 밑에는 1930년대까지만 해도 막걸리와 산채 비빔밥을 파는 주막이 많아 해질 무렵에는 상인과 통행인들로 문전성시를 이루었는데, 곶감장수, 소장수, 소금장수 등의 행렬이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라고 했다. 1950년대 까지 많은 주막들이 집단적으로 분포하기도 했지만, 이러한 주막들은 625 후에 이 지역에 공비들이 자주 출현해 어쩔수 없이 치안유지상 소개령(疏開令 : 공습이나 화재 등에 대비하기 위해 한곳에 집중되어 있는 주민, 물자, 시설물 등을 분산시키는 명령)으로 철거되었다.

예로부터 농암지역은 신라(고령가야) 땅으로 백제 고구려와 국경 지역이어서 전략적 요충지였다. 큰 잘못을 저지른 사람들이 고모령을 넘어가기만 하면 다른 나라이므로 죄인을 잡지도 못했다는 것이다. 이곳 사람들은 지금도 무슨 일을 하다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생기면 “고모재 넘어갔다.”는 말을 사용하고 있다. 문경현지에는 지금의 궁기리 전체를 <고모리(古毛里)>라 기재하고 있는데, 당시 행정구역 개편시 고모리가 사라지고 궁기(宮基 : 궁터의 한자표기)리로 개칭한 것을 보면 고모리와 궁터라는 지명이 궁기보다 더 오래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궁기1리에 해당하는 <궁터마을>은 청화산과 조항산 지맥이 동쪽으로 뻗어내린 골짝에 형성되어 상궁 중궁 하궁으로 말바우까지 길게 이어진다. 궁기2리에 해당하는 <고모재마을>은 조항산과 둔덕산 지맥이 궁터마을보다 좁은 계곡을 따라 마을과 길이 길게 형성되어 전방이 허하지 않고 아늑한 느낌을 주며, 마치 앞이 터지지 않은 옷을 여민 것같아 보인다. 두 마을이 서로 막힌 지세로 인해 궁터마을은 갓바우재를 넘게 되는 길이 생기고, 고모재 마을은 고모령을 넘는 길이 생기게 되는 지형을 이루고 있다.

특히 고모재 마을은 조항산과 둔덕산의 깊은 골짜기 사이에 있어 작은 골이 많을 수밖에 없다. 갓바우가 있는 조항산이 만든 아홉 골은 복골-지경골-어두운골-아랫중무골-윗중무골-질그레미골-대나무골-양대밭골-물탕골이다. 반면 마고할미 바우가 있는 둔덕산이 만든 골은 열다섯 곳으로 텃골-솔무골-뱀장이골-낙여미골-작은골-큰골-샘골-절토골-은박골-초당골-적박골-복호골-고모재골-짐팟골-바람맞이골이다. 골짜기 숫자만 봐도 고모재마을 길이 궁터마을보다 더 궁벽한 계곡 길임을 알 수 있다.

이 고개는 삼송리를 포함해 고려 공양왕(1389년)때 부터 1963년까지 589년 동안 문경현에 속해 있었다. 조선시대에는 이 지역이 가은현이었고, 1914년 행정개편시 가서와 가남을 합해 농암면으로 바뀌었다. 고개는 보통 국경이나 지역의 경계를 나타내지만 고모령의 경우는 전설이나 문화, 언어 등에 영향 없이 오랫동안 통째로 농암의 고개로 자리매김 되어왔다. 견훤이 훈련을 했다고 하는 유적이 농암의 <말바우와 북실 북짓골>과 삼송리쪽 고개녘엔 <마당바위>가 있고, 농암장과 청천장이 5·10일 같은 날 서는 것도 고모령이 남긴 잔재로 볼 수 있다.

고모령! 이 고개가 하나의 작은 길로 보일지 모르지만 역사를 들여다보면 그렇지 않다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조항산 갓바우와 둔덕산 마고신의 마고바위가 지켜주는 이 길은 하늘이 내린 특별한 고개이자 선택받은 사람들이 기쁜 소식을 들으며 <웃고넘는 고모령>이라 부를 수 있다. 견훤이 이곳에다 궁궐을 짓고 말바우와 북짓골에서 군사들을 훈련하며, 농암리에 견훤산성을 쌓은 것은 단순한 일반 통행로가 아닌 역사적인 왕도가 아니겠는가. 조선 중기 도찰방을 지낸 선비 김이원이 만년에 조항산에 의상대를 쌓고 그 아래 하강정을 지어 인의와 덕성을 가르쳤다는 것을 보면 이곳을 선택받은 길지라 불러도 무방하리라 생각된다.

근경보다 원경이 훨씬 좋은 조항산! 농암리 쪽에서 보면 좌측에는 갓바우가 비상하는 독수리로 보이고, 우측에는 마고할미 통시바우와 손녀마고 통시바우가 연봉을 이루며 만물상으로 다가온다. 이런 산이 빚어낸 계곡인 궁기천변에는 선사시대의 돌칼과 돌화살촉, 반월형석도 등이 발견되고, 궁궐터와 말바우 등 견훤과 관련된 많은 전설들이 내려오는 걸 보면 오래 전 부터 이곳에 많은 사람이 거주했다는 입증이 아니겠는가. 임진왜란 이후 상업활동이 활발해지면서 상인들의 왕래가 많아져 고모령 노변에는 농암과 송면 두 곳의 장시가 1700년대 말부터 형성되었다. 그 후 점점 많은 사람이 고개를 넘나들며 이러저러한 사연들이 쌓여갈수록 기억에 남는 건 눈물겨운 사건들이 주를 이루는 것, 그러기에 고모령은 가까이 보면 넘기 힘든 가풀막진 고개이고, 멀리서 보면 멋진 추억을 만들어주는 희망의 고개가 되었으리라.

1945년 해방 직후 박헌영의 남조선 노동당과 보도연맹 조직의 확산 등으로 자유 민주주의 수호가 위기에 처한다. 이때 군민들에게 보다 투철한 반공사상과 올바른 국가관을 심어주기 위해 자생적으로 조직된 농암면 대정마을 청년 중심의 <버들피리 악극단>원들이 있었다. 그들은 군내 곳곳을 돌아다니며 공연을 이어가다가 험준한 고개가 있어 공연하지 못한 삼송리 주민을 위해 고모령을 넘게 된다. 소품과 악기 등 무거운 짐을 지게에 바리바리 지고 힘겹게 고모령을 넘은 그들은 그날 밤 공연을 저지하고자 출몰한 몽둥이를 든 수십 명의 보도연맹 무리들과 일촉즉발의 충돌 위기를 맞으면서도 남다른 애국·계몽정신을 발휘, 이를 잘 극복하고 계획된 공연을 성공리에 상연할 수 있었다.

1969.12월, 청암중 18회 여용수외 2명이 고모령을 넘어 청주 소재 고등학교 시험을 치르게 된다. 손은 호호 녹이고 발은 동동 구르며 중3 졸업반 학생 셋이서 청주까지 걸어가 시험을 잘 치르긴 했으나 돌아오면서 고모령을 넘는데 허리까지 빠지는 폭설로 인해 불의의 조난을 당한다. 시험을 보고 돌아와야할 자녀들이 돌아오지 않자 부모들이 고모령을 올라 목이 터져라 이름을 부르며 절규했건만 끝내 눈밭에선 메아리마저 답하지 않았다. 울고 불며 고모령을 헤매다 겨우 눈에 묻혀 머리만 보이는 그들을 찾아 차가운 얼음덩일 안고 내려왔는데 마고신의 도움을 입었는지 여용수 학생만 하늘나라로 가고 두 학생은 기적적으로 회생하였다. 며칠 뒤 합격 통지서를 받았으나 그것을 받고 궁터마을은 다시 눈물바다가 되었으니 공부로 소원을 푼 게 아니라 외려 한을 품게 된 사건이 되었다.

1972.12월, 종곡리에 사는 중1 대찬이 사춘기를 맞아 이유없는 반항과 자신의 생각과 현실의 괴리 앞에서 자포자기하며 학교를 가지 않는 등 심각한 방황에 빠져 자살할지 모르는 지경까지 이른다. 질풍 노도같은 세상 파고에 휩쓸려 작은 배 한 척이 침몰하고 있는 중인데, 이를 말없이 지켜보고 있던 오백(고2)은 청화산과 조항산과 고모령을 넘으면 반드시 새로운 기운을 듬뿍 얻어 변신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이에 일홍(고1), 상록(중3)이 함께 동참, 넷이서 아침부터 연엽산을 넘어 시루봉, 그리고 청화산을 오른다. 겨울 산행에 변변치 않은 차림으로 겁도 없이 실행한 산행 중, 예상치 않게 늑대를 만나 위험에 빠져 한동안 자세를 낮추며 숨을 죽였고, 가파른 절벽은 돌고 큰 바위는 배를 대고 기어서 가까스로 위험하게 길을 열어나갔다. 왼종일 가다보니 힘이 빠져 이제는 온 길을 되돌아갈 수도 없을 무렵, 그들은 하나의 일념으로 청화산에서 조항산을 거쳐 입석리 삼송리를 향해 녹지 않은 눈이 무릎까지 빠지는 고난의 강행군을 지속한다. 결국 바지가 장작처럼 뻣뻣하게 얼어붙은 어둠이 깃든 저녁, 일면식도 없는 삼송리 최애숙 학생(당시 국교 5년) 집에서 젖은 옷을 말리며 하룻밤 민박했다. 그리고 다음날 고모령을 넘어올 때 대찬은 이미 자신의 문제를 치유받고 더 열심히 공부하여 큰바위 얼굴처럼 되겠다며 변화를 받았으니 고난과 위기의 시간이 기회와 축복의 시간으로 바뀐 것이다. 대찬은 그 뒤 가열차고 대차게 자기 인생을 열어나가며 남다른 삶을 살아가고 있다.

고모령의 정상에는 성황당이 있었고, 옛날 재를 넘나들던 사람들이 먹던 석간수인 <고모샘>이 재 아래 20미터 지점에 있으며 거긴 요즘 도룡뇽이 살고 있다. 수량이 항상 일정하며 영험하여 산에 오르는 도중 부정한 짓을 하면 천하명수의 효과를 보지 못한다고 전한다. 고모령 고개를 만들어낸 신령한 조항산, 그 아래 골짝에는 절골이 있는데 이 골짜기는 마고신의 힘이 하늘로 비상하는 신성한 곳으로 인식되어 있다. 그래서인지 예전부터 사냥꾼들이 절골에서는 짐승 한 마리도 잡아본 적이 없다고 한다. 절골에서 짐승이 죽어서 나간 적이 없으며 이 골짜기를 벗어나야만 짐승이 잡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6.25 전시 때도 당시 마을 인구가 750여명이나 되었지만 마을에 전사자가 단 1명도 없었다. 이곳 골이 깊어 사람들이 못살 곳이라 했지만, 마을이 화를 당한 적이 없어 주민들은 세상 어느 곳보다 이곳이 가장 살만한 동네라고 생각했다. 주막이 있었고 장이 열렸지만 도둑이 없고 전쟁의 교통로로 이용되지도 않았으며, 한편으로 이 고개를 중심으로 국경을 마주하여 이곳은 아무나 쉽게 범하지 못하는 신성하고 특별한 완충지대같은 곳이었다.

고모령에서 고모재 마을로 내려가는 우측 편 계곡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도덕동천(道德洞天)>이라고 전서체로 새긴 큰 바위가 있고 그 바위에는 여섯 사람의 이름이 나란히 음각되어 있다. 자연을 사랑하는 마음이 과하여 자신들의 이름을 새겨두고 싶은 마음은 이해가지만 천혜의 자연은 그대로 두고 함께 즐길 때 진정한 가치를 오래 갖게 되는 법이다. 도덕동천은 조항산과 둔덕산이 만들었고, 우복동천은 청화산과 도장산이 만들었으니 농암이라는 작은 고을에는 2개의 동천이 있다. 동천이 만든 궁기천과 쌍용천이 합수한 농암천이 성재산을 휘감아 돌고 있어 지혜로운 견훤은 강물이 성을 감돌아 적의 침입을 보호해 주는 해자형의 길지임을 알고 견훤산성을 쌓아 천혜의 요새지로 만들었다. 고로 농암은 <1성 2동천>의 고장이자 <남북 대칭의 양수겹산>을 품은 선택받은 땅이 아니던가.

몇 년 전부터 13개 지자체 단체장들이 <중부권 동서 횡단철도> 계획을 수립, 349km의 건설사업이 야심차게 추진하고 있다. 울진에서 당진까지 6시간 소요되는 길을 2시간으로 줄이고 새로운 관광자원과 신산업의 활성화를 통한 첨단 물류네트워크 구축을 기대하고 있다. 울진-봉화-영주-예천-문경-괴산-청주-천안-아산-예산-당진으로 이어지는 철길에서 <문경-괴산> 구간은 반드시 고모령을 통과, 농암에 역이 생기게 되어 그동안 잠들어 있던 고모령이 부활되는 그날을 목전에 두고 있다. 다시 말해서 예전에 울고넘는 고모령이었다 해도 이 철로가 개통되고 나면 기차를 타고 웃고넘는 고모령이 될 것은 너무도 자명하다. 하여, 대구에는 <고모령가요제>가 있다면 농암에는 <고모령견훤축제>가 개최될 날이 자못 기다려진다.
문경시민신문 기자  ctn6333@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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