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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복(牛伏) 길지를 찾아온 두 나그네
글 - 김병중
문경시민신문 기자 / ctn6333@hanmail.net 입력 : 2023년 09월 19일(화) 1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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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문경시민신문 | | 소가 엎드린 형상을 하고 있는 산을 우복산(牛伏山)이라 부르며, 그 소의 배 부분에 해당하는 곳을 최고의 길지로 꼽는다. 조선 후기의 실학자인 이중환은 십승지를 선했는데 그 중 한곳이 바로 청화산 아래쪽이다. 그 곳이 얼마나 맘에 들었으면 자신의 호를 “청화산인”이라 짓고 병화가 없는 복된 땅이라 했다. 청화산에 연한 연엽산 지맥인 우복산은 화산리 쪽이 소의 귀를 닮았다하여 “귀밑”, 종곡리 쪽이 소의 뒷발 부분 같다고 하여 “뒷발이”라 부르고 있다.
세상에 복 받기를 원치 않는 사람이 어디 있으랴. 정유재란 때 이여송 장군을 따라 왔다가 귀화한 명나라 두사충은 자신을 구해준 정탁대감에게 연주패옥(連珠佩玉)의 묘자리와 가은 아호동 명당 집터를 알려준 일화가 있으나 그 자리는 손쉬운 소유가 되지 않음을 알게 한다. 조선 후기 나라가 어지럽고 국난이 빈번하자 길지를 찾아 떠도는 사람들이 더러 있었다. 형색이 허름한 스님이 하룻밤을 묵어가자고 한 것을 문전박대했다가 벌을 받기도 하고, 후히 대접하여 복을 받는 이야기도 더러 전래되어 온다.
문경은 우리나라의 단전이라 하고, 또한 백두대간의 중심이라고도 한다. 그리고 바다로 나가자면 제일 많은 시군을 거쳐야하는 행정구역으로, 어디로 가나 유일하게 4군데 이상을 거쳐야 바다로 도달할 수 있는 이중 내륙도시로, 그만큼 산이 둘러싸고 골이 깊으며 바람과 물의 흐름이 순하여 예로부터 길지로 주목을 받았다. 문경에서 가장 깊은 산촌인 동로에 가면 연주패옥이 있고, 농암에 가면 우복동천이 있으니 때로는 별반 표나지 않고 소리 없는 축복이 임하기도 한다.
국정이 문란하고 도적이 창궐하던 때 떠돌이 나그네가 되어 정처 없이 유랑하던 서문경과 정광동, 이 두 사람이 발길을 멈춘 곳은 농암이었고, 그들은 이 고을의 순후한 민심에 매료되고 십승지 우복의 기운에 힘입어 동네 머슴의 일을 자처하며 평생을 봉사와 희생으로 임하며 생을 즐긴다. 그리고 육십이 넘는 생을 살고 난 뒤 자신이 모은 재산 전액 마을에 기부하고 지상의 소풍을 마감한다. 서문경은 제사에 찬물 한 그릇이면 족하다 했고, 정광동은 잘 묻어만 달라고 했으니 이들은 길지에 살다가 길지의 땅에 잠든 위인이 아니겠는가. 요즘 각박한 세상에 이러한 두 사람의 생애는 나눔과 봉사의 귀감이 되기에 이 나그네의 삶을 한번쯤 관조해 보는 기회가 되었으면 한다.
서문경(徐文京, 1818~ 1884)은 1839년 그의 나이 스무살 때 농암리로 찾아들었다. 당시 천주교 신도들에 대한 박해가 극심했고 세도정치의 폐단과 삼정의 문란으로 백성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였다. 이러한 난세를 피해 농암에 찾아들어 조건 없이 먹여주고 재워주는 조건으로 동네 머슴살이를 자청했다.
그리고 1850년대 어느 해 콜레라가 돌아 동네 수십명이 숨지자 살기 좋던 동네가 죽음의 마을로 돌변했는데, 이런 주검 앞에 가족들도 피했지만 그는 일을 자기 목숨을 돌보지 않고 수습 안장하여 동네사람들을 감동하게 만들었다. 어느 해에는 농암천변에서 놀던 아이들 3명이 하천 범람으로 급류에 휩쓸려가자 다른 사람들은 발만 구르는데 그가 목숨을 걸고 물로 뛰어들어 전원을 구조해냈다. 이런 그의 행동에 매료되어 동네에선 그에게 한해 세경으로 벼 한섬을 주었다.
그가 65세가 되던 해 45년간의 머슴살이로 논 두마지기를 마련하게 되었다. 그는 “돌에도 나무에도 의지할 데가 없는 불쌍한 저를 평생토록 아무 탈없이 살게 해준 농암을 저승에 가서도 잊을 수 없습니다. 죽거들랑 장례나 치러 주시고 제삿날에는 찬물이나 한 사발 떠놓아 주시길 바랄 뿐이라”고 유언하고 10.17일 눈을 감는다.
마을 사람들은 서문경이 힘겹게 일하던 냇가 양지바른 들판인 마을 앞 낙수바우들 아래 꽃비리에 무덤을 짓고 제삿날이면 동네사람들이 모여 제사를 받들었다. 동네사람들은 그가 죽은 지 백돌을 맞아 묘소 앞에 망주를 세우고 “농암골의 수호신 서문경의 1백주년을 기념, 농암1리 동민들이 건립함”이라고 비에 새겼다.
농암리 주민들은 그가 남긴 두마지기 논의 도조를 대대로 모은 기금으로 마을회관을 건립키로 뜻을 모았다. 77년3월, 그가 남긴 논(농암1리 165의1) 196평을 대지로 조성, 건평40평 규모의 마을회관을 지었다. 회관은 「서문경회관」이라 이름지어 각종행사를 치르고 예식장으로도 대관하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약 백여년 전 한우물에 걸식하는 고아 정광동(鄭廣東, 1867~1934)이 있었다. 그는 전라도에서 왔다고 하며, 본관은 동래라고 하나 조실부모하여 신상관계는 파악이 곤란하다. 그는 빈 몸으로 마을에 들어와 장성하여 품을 팔면서 온순하고 검소하며 성실하게 일을 하면서 한우물 동네에 정착했다. 동네 길흉사를 자기 일처럼 돌보며 솔선수범하였으므로 사람들의 칭송이 자자했다. 외롭게 살면서도 묵묵히 일을 하고 알뜰살뜰히 돈을 모아 만년에는 논600평과 밭400평을 사서 농사를 지으며 어느 정도 여유를 갖게 된다.
하지만 얼마 되지 않아 건강이 좋지 않게 되자 이적지 모은 재산을 동네에 모두 내 놓으며, 그동안 좋은 사람들과 더불어 좋은 동네에서 이렇게 환갑이 넘도록 장수하며 살았으니 너무 감사할 뿐이라며 사후에 “묘나 잘 써 달라.”고 김상건 과 권태혁에게 부탁했다.
그는 향년 67세로 생을 마감했고, 동민들이 <마을장>으로 장례식을 잘 치러주었다. 정광동의 묘를 우복 길지라 부르는 우복산 골안 양지터에 지어주고 “야옹동래정공광동지묘(野翁東來鄭公廣東之墓)”라는 묘비를 세웠다. 이후 동네에서는 김상건이 <대정유지조합> 만들어 마을 공회당을 짓고, 매년 정광동의 기일인 음11월10일을 동네 대동일로 정했다. 이날은 동민들이 함께 모여 한해 결산과 새해 예산 편성을 하며 마을 잔치가 벌어지는 날로 보내는 것이 상례가 되어 지금까지 이어져오고 있다. 그는 세상을 떠났어도 그의 형해는 소의 배에 해당하는 우복산 아래 길지에 편히 잠들어 있고, 그의 동네를 사랑하는 마음은 열심히 일하는 순한 황소처럼 살아 있어 동민들은 그를 잊지 않고 기리며, 매년 그의 기일을 애향심을 다지는 날로 삼아 제사를 올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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