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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경문협(회장 김종호), 제11회(12.5) 2020 문경문학아카데미 실시!
지난 5일 오후 2시-4시까지 문경시립중앙도서관 2층 어학강의실에서 회원 20여 명 참가
문경시민신문 기자 / ctn6333@hanmail.net입력 : 2020년 12월 12일(토) 1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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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앞줄 왼쪽에서 세번 째가 손택수 시인
ⓒ 문경시민신문
문경문협(회장 김종호)은 지난 5일 오후 2시-4시까지 문경시립중앙도서관 2층 어학강의실에서 회원 20여 명이 참가한 가운데 손택수 시인을 초청 '시와 자연과은유'라는 주제로 제11차 문경문학아카데미를 실시했다.

손택수 시인의 강의 원고는 다음과 같다.

*관념 너머에 여우가 있다.

손택수

시란 무엇인가? 에드거 앨런 포우는 아홉 개의 이름을 지닌 ‘코르시아(Corcyra)’라고 답한다. 코르시아는 그리스의 섬 코루푸의 옛 이름이다. 둔라, 모라, 탁라, 탐라, 영주, 제주, 삼다도 같은 여러 이명을 지닌 제주도처럼 포우에 따르면 코르시아는 자유자재로 형태를 바꾸는 프로테우스 신과 같은 개념이다. 포우의 시에 대한 정의는 엘리엇의 말과 친족유사성의 관계에 있다. T.S. 엘리어트는 ‘시의 정의의 역사는 오류의 역사다’라고 하였다. 그의 말은 시의 개념이 완료형이 아니라 진행형의 상태로 인류사와 함께 해 왔음을 알려준다. 시작법은 그러므로 견고한 건축물로서 구축되는 것이 아니라 유동하는 바람의 형식을 쫓는다. 모든 작시술은 참조되면서 의심되는 속성을 함께 품고 있다.

1. 도구를 넘어서

산에는 정해진 등산로만이 아니라 사용하지 않는 옛길이나 잊혀진 길 혹은 드물게 약초꾼들이 다니는 길도 있다. 인기척을 피해 가능한 노출을 꺼리며 다니는 멧돼지나 산양의 길도 있고, 좋아하는 상수리나무 가지를 건너뛰며 도약하는 다람쥐나 청솔모의 길도 있다. 지도에는 없는 야생의 길을 찾아 고독하게 암벽을 타는 산악인들의 길도 있을 것이다.

시인들은 지도의 지시만이 아니라 평소의 등산로로부터 슬쩍 벗어나서 다른 길의 가능성에 자신을 개방하는 연습을 게을리하지 않는다. 시인에게 반복되어도 좋은 것은 바로 사랑으로서의 이 습관밖에 없다. 정해진 길이 아니라 위험이 따를 수도 있지만 익숙하지 않은 길에서 만나는 싱싱한 공포와 비경 앞에서의 감탄은 일상에 묶인 그의 시간대를 창조와 생명의 축제로서 비일상의 시간대로 훌쩍 건너뛰게 한다. 물론 그 풍경은 명승지나 웅장한 스케일의 경관들과 비교할 땐 사소한 발견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스스로 찾아낸 풍경은 통조림 깡통 속의 참치가 아니라 살아 펄떡이는 대양의 참치와 같은 싱싱한 삶의 맥박 음을 선물한다. 이 자발적 경험은 아무리 보잘 것 없는 풍경이라도 그 어떤 명승지 못지않은 장관을 그의 삶의 지도 속에 기입할 것이다. 산중의 등산 방식을 일상에 적용해서 늘 다니던 등굣길이나 출퇴근길의 코스를 달리하면 데면데면하게 나열되어 있던 풍경들이 마치 맘먹고 떠난 여행지처럼 펼쳐질 수도 있을 것이다. 여행자가 되면 삶의 세목들이 먼지를 벗고 낯설어지듯이 시는 휴가철만 기다리다 관광상품을 소비하고 다시 일상으로 복귀하는 쳇바퀴의 굴레를 벗어나서 우리를 진정한 삶의 여행자로 만들어준다. 그때 우리는 자신의 삶을 창조하면서 동시에 자신을 둘러싼 세계와 깊이 있는 관계를 회복할 수 있다. 시인은 그 관계의 회복을 위해 일상어와 시어의 관계를 마치 말을 처음 익히는 아이처럼 초발심으로 돌아가 사유한다.

시를 쓰고자 하는 욕망이 앞서서 시의 언어적 특질에 대한 이해를 건너뛰는 경우가 많은데 그것은 독도법을 숙지하지 않은 산악인처럼 겪지 않아도 될 시행착오를 장기화하기 쉽다. 우리의 일상은 구속과 자유, 반복과 차이, 거짓과 진실, 생성과 소멸 같은 이항대립이 마주치며 길항하는 장소이다. 일상은 체제의 구성물이면서 체제를 바꾸는 가능성을 갖고 있는데, 그 구심력과 원심력이 동시에 작동하는 시 또한 체제의 한 요소로서 체제 바깥을 향해 있다. 요컨대 시의 언어는 일상어이기는 하지만 일상어의 방식과 다르게 작동한다. ‘나는 오늘도 밥을 먹는다’를 ‘오늘도 밥이 나를 삼켰다’거나, ‘나는 너를 잊었다’를 ‘나는 너를 까먹었는데 계속 배가 고파’라고 하거나, ‘눈물이 흐른다’를 ‘눈물이 털실처럼 풀어진다’라고 다르게 말하는 것이 시적 언어의 특징이다. 일상적으로 쓰는 언어들의 용법이 도구적인 관계에 치중하고 있는 데 비하여 시적인 용법은 심미적인 환기를 통해 고정된 질서의 작동을 멈추게 한다. 가령, 의자는 실용적인 용품에 지나지 않아서 용도가 다하면 폐기되지만 거기에 추억을 입히면 고유하고 독립적인 사물이 되고 나무의 기원을 따라가면 생명으로 바뀌며 사람 대신 꽃을 앉혀놓으면 단순한 생활용품 의자가 아니라 미적인 가치로 전환된다. 용도로 가치를 평가하는 폭력적인 습관은 인간마저 폐기의 대상으로 몰고 가기 쉽다. 시는 그런 폭력에 맞서기 위해 실용성에 지배되는 일상의 배열 원리를 정서적 원리로 전환한다. 시는 인간에 의해 제작된다는 점에서 도구와 같지만 특정 용도를 갖고 있지 않는다는 점에서 자족성을 지닌 사물과 유사하다. 시에서 사물은 인간을 위한 수단이나 도구이기를 그치고 언어는 그 꿈을 실현하고자 한다.

이런 훈련을 통해 표정이 하나밖에 없는 무뚝뚝한 일상어에 미묘한 균열이 생겨나고 그 틈으로 생동하는 숨결들이 들고나면서 더 유연하고 풍부한 표정들을 지닌 미적 공간을 우리는 살아가게 된다. 이와 관련하여 초현실주의자 시인 앙드레 브르통(Andre Breton)의 삽화는 산뜻한 명상으로 우리를 이끈다. 브르통이 뉴욕의 공원에서 떠돌이 맹인 거지를 만났다. 거지는 '나는 맹인입니다(I am blind)'라고 쓴 팻말을 목에 걸고 구걸 중이었다. 행인들은 무심히 그냥 스쳐 갈 뿐, 그 누구도 그에게 돈을 주지 않았다. 딱하게 여긴 브르통이 맹인의 목에 걸려있던 문구를 바꾸어 놓고 그 자리를 떠났다. 그로부터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후 맹인 앞에 있던 통은 사람들이 넣어준 돈으로 순식간에 가득 차게 되었다. 돈뿐만 아니라 따듯한 위로의 말을 전하고 가는 사람들까지 있었다. 어떻게 된 일일까. 맹인은 어리둥절해 하며 팻말에 쓴 새 문구를 행인에게 읽어달라고 청했다. '나는 맹인입니다(I am blind)'는 이렇게 바뀌어 있었다. '봄이 머지 않았는데 나는 그 봄을 볼 수 없습니다(Spring's coming soon. But I can't see it)'. 일상어의 표현이 정보만 제공하는 도구 역할에 머물고 있는데 비해 브르통의 새 문구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정서적인 맥락을 품고 있었던 것이다.

2. 관념 너머에 여우가 있다

관념어나 개념어엔 절망이 없다. 자연의 가변성과 역동성을 고정시킨 체계와 논리, 위계적인 영토와 범주화, 세계의 변동과 천변만화하는 양상들을 단일한 규칙과 안정된 질서의 회로 속에 가두는 획일화가 있을 뿐이다. 물론 외부세계를 끊임없이 규범화하고 법칙화해서 체계를 구축하고자 하는 시도는 하나의 범주로서 세계를 이해하는 편리한 렌즈가 될 수 있다. 하지만 투명하게 연마된 렌즈는 저마다의 개성과 차이를 이질적인 것으로 배제하거나 외면하면서 보고싶은 것만 보고자 하는 습관에 길들여지게 한다.

‘절망’이라는 말은 어떤가. ‘절망’에서 암벽에 매달려 추락 직전까지 내몰린 자의 손톱자국이나 바위 주름에 발을 걸고 버티는 안간힘을 느낄 수 있는가. 겨울 어느 날 마포대교 난간 끝에 벗어놓은 누군가의 뒤축이 닳은 신발이나 홀로 찾은 산정 벼랑 끝 헛디딘 발끝으로 까마득하게 떨어져내리던 돌멩이의 비명 소리가 들리는가. ‘절망’이라는 말에 태초의 섬처럼 해도에도 없는 섬이 되어 솟아오르는 바위의 감격이 있는가. ‘꽃’에 꽃의 빛깔과 꽃받침의 모양 그리고 바람이 불면 저마다의 뉘앙스로 흔들리는 자세가 없는 것처럼, ‘컵’에 컵의 무게와 촉감 그리고 손에 쥐었을 때의 저마다의 느낌으로 안겨오는 질감이 없는 것처럼 ‘절망’은 그저 약속된 언어 기호일 뿐이다. ‘절망’이 절망의 실제를 은폐하고 있는 것이다.

날씨의 예를 들어보자. 개미들이 떼를 지어 이동하거나 제비가 낮게 날면 비가 내릴 거라고 했던 농경문화시대의 예보는 구체적인 몸의 감각에서 나온 경험 지혜가 있었으나, 땅과 하늘과 자신을 둘러싼 자연의 변화에 대한 감각을 상실한 채 우리는 기상대 일기 예보를 통해 날씨를 관념적으로만 경험한다. 비올 확률 몇 퍼센트, 눈 올 확률 몇 퍼센트 식으로 확률 단위로 계산되어 예보되는 날씨엔 바람 소리도 구름의 이동도 없다. 그것은 마치 다채로운 물의 이미지들이 기호 ‘물’로 추상화되고 마침내는 화학기호로 단순화 되는 과정과 같다. 추상화된 자연은 감각적이고 구체적인 만남으로부터 인간을 소외시킨다. 나의 몸과 감각이 제외된 예보는 경험이 배제된 한낱 정보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이것이 인간을 고독하게 한다.

시의 언어엔 절망이 있다. 절망이 부르는 근원적 성찰이 있다. 절망이 없는 관념어의 사회에서 시적 언어는 절망을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 비둘기가 ‘평화’의 상징으로 상투화되고 도시의 건축물을 부식시키는 환경부 지정 ‘위해조류’로 낙인찍힐 때 그 자동화를 끊고 ‘평화’와 ‘위해조류’의 틀에 묶이지 않는 비둘기의 구체적 실상을 외면하지 않고자 한다. 관념에 의해 획일화된 비둘기를 과연 어떻게 해방시킬 수 있을까. 이러한 질문의 형식 속에서 시의 절망은 희망의 근거가 된다.

a. 비둘기는 평화다.
b. 비둘기는 평화를 모르면서도 평화의 노래를 부른다.
c. 비둘기는 아이러니스트다. 그는 평화의 노숙자다.

a가 문명과 제도 언어를 학습한 뒤 자동적으로 사유하는 인간의 발화라면 b는 거기에 대한 반성적 성찰의 발화이고 c는 그로부터 나온 아이러니한 의인화다. c에 이르러 도시의 노숙자가 된 비둘기의 비애를 읽을 수도 있고, 문명에 대한 비판적 시각 혹은 각종 복지 정책에 대한 시니컬한 문제 제기나 인간의 삶에 대한 도발적 시선을 읽을 수도 있을 것이다. ‘평화’라는 관념을 지운 자리에서 관념이 지우고 있는 평화에 대한 사유와 상상력이 일어난다. 세잔은 그래서 일찍이 사과의 실제에 이르기 위해서 먼저 자신의 머릿속에 저장된 기억과 엄청난 전투를 벌여야 했노라고 고백했다. 사과의 상징을 지우고, 선배들의 표현방식을 지우면서 기존에 알고 있던 사과의 형태와 색채까지 지워야 나만의 사과를 그릴 수 있다고 했다. 아는 만큼 보이는 것이 아니라 아는 만큼 보지 못할 수 있음을 세잔은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 방법적인 관념 지우기는 티베트 승려들의 만다라 작업과 유사하다. 쉽게 흩어질 수 있는 모래알로 만다라를 그리기 위해선 여간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안 된다. 실수를 용납지 않는 고도의 정신집중! 그런데 승려들은 공들인 작업을 마친 뒤엔 그 이미지를 단번에 지워버리거나 물에 흘려보내버린다. 중요한 것은 색색의 이미지가 아니라 완성된 이미지 너머에 있는 세계이기 때문이다. 어떤 결과보다 집중의 과정 자체와 지움의 해방감을 존중하는 마음은 완성을 미완의 상태로 돌려놓음으로써 겸허하게 새로운 만다라의 출현을 기약한다. 확고부동한 관념이나 개념이 모래알을 붙들어두고자 하는 작위의 몸짓이라면 시의 언어는 바람결에 뒤채는 모래알을 바람과의 교감으로 되돌려주는 자연의 몸짓이다.

관념의 세계는 철근 한 근과 모래 한 근의 차이를 무시한 채 오직 한 근의 무게로서 같은 것으로 이해하지만 시적 이미지는 무게의 동일성에도 불구하고 철근과 모래의 질적인 차이를 존중한다. 이미지의 세계는 그래서 각자의 실존에 바탕한 구체적 경험을 중시한다. 이 경험에서 관념이 줄 수 없는 새로운 의미화에 대한 희망이 가능해진다고 본다.

나는 상상한다, 이 순간 깊은 밤의 숲;
무엇인가가 살아 있다
시계의 고독 옆에
손가락이 움직이고 있는 텅 빈 페이지 옆에.

창 밖에 별이 없는 것을 봄;
어둠 깊숙한 곳에서 무엇인가가
조금씩 더 가까이
고독 속으로 들어오고 있음;

차갑게, 어둠 속의 눈발처럼 우아하게,
여우의 코가 닿는다, 잔가지에, 잎사귀에;
두 개의 눈이 한 동작에 바쳐진다, 지금
지금, 지금, 지금
나무 사이 눈 속에 아기자기한
무늬를 남기며. 그루터기 옆
움푹 들어간 곳에서 머뭇거리는
신중한 절름발이 그림자
대담하게 숲 속 빈터를 가로질러 온,
그의 육체, 녀석의 눈동자,
넓어지고 깊어지는 푸르스름함,
골똘히, 훌륭하게,
자신의 볼일을 완수한다

마침내, 뜨거운 여우의 악취가 느닷없이
머리의 어두운 구멍 속으로 들어오고.
창에는 여전히 별이 없다; 시계가 째깍인다,
백지는 채워졌다.

- 테드 휴즈, 「생각 여우」(『오늘부터, 시작』, 비아북, 2019)

시를 창작하는 과정을 엿볼 수 있는 작품이다. 언어와 이미지가 살아 있어서 시를 하나의 생명체처럼 접근하고 있는 시인의 태도가 인상적이다. 시를 여우로 비유한 작품으로서 시에 대한 시, 일종의 ‘메타시’라고 하면 누군가는 여우가 무의식의 에너지와 그림자를 상징한다고 말할 수도 있으리라.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번역이 달라질 수도 있을 것이다. 1980년대 『테드 휴즈의 시작법』1) 에선「詩想-여우」로 번역되었고 2000년대의 시인은 위와 같이 「생각여우」로 번역하였다. 미세한 차이지만 시에 관한 시에서 보편적인 사유로 여우의 이미지를 넓히고자 하는 변화를 엿볼 수 있다. 생각이든 시든 여우로 형상화된 이 작품은 문명화 과정에서 야성을 잃고 ‘시계의 고독 옆에 텅 빈 페이지’로 남은 공허한 화자의 내면을 여우의 동물적 본성으로 채우고자 하는 의지를 성공적으로 보여준다. 아마도 이 시인은 시원의 동물적 본성을 억제하면 할수록 통찰의 힘이 퇴화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기도 하다. ‘머리의 어두운 구멍’ 속으로 우리를 인도하는 이 여우의 이미지는 가시적인 이미지로서 비가시적인 세계를 드러내는 과업을 훌륭하게 완수하고 있다. 성공한 이미지는 이렇게 일면적 의미에 묶이지 않는 다성적인 힘을 갖고 있다.

관념이나 개념을 감각적인 이미지로 번역하는 작업만으로도 시는 가능하다. 번역을 직접적 진술이 아니라 간접적 묘사로 이해해도 좋다. 연애라는 관념을 어떻게 감각적 이미지로 번역할 것인가. 아취볼드 메클리시( Archibald MacLeish)는 「작시법」이란 시에서 ‘기울어진 풀잎과 바다 위 두 개의 불빛’을 보여준 뒤 ‘시는 의미할 것이 아니라 존재해야 한다.’고 했다. 연애에 대한 구구한 설명과 넋두리보다는 선명한 이미지를 제시할 때 독자의 감응력이 생긴다는 말이다. 동양미학에서는 예부터 관념의 감각적 제시를 설명 대신 ‘형상을 세워 뜻을 전달한다’고 해서 ‘입상진의(立像盡意)’라고 했다. 송나라 휘종 황제는 어느 날 화공들에게 ‘답화귀거 마제향(踏化歸去 馬蹄香)’ 즉, ‘꽃 밟으며 돌아가니 말발굽에 향내 나네’라는 화제를 준 뒤 짖꿎게도 그림으로 향기를 그려보라는 조건을 달았다. 어떻게 시각으로 후각을 환기할 수 있겠는가. 대부분의 화공들은 꽃을 밟는 말발굽을 그렸는데 단 한 사람만이 화면 끝에 말발굽을 쫓는 나비를 그렸다고 한다. 휘종은 그에게 두둑한 상을 내렸다. 이 같은 간접적 제시가 시에서의 이미지요 비유요 흔히들 말하는 객관적 상관물이다.

3. 에피파니

언어를 학습한다는 것은 국민국가의 네트워크 속에서 삶을 등기하고 적응시키는 사회적 변화의 과정에의 순응을 뜻한다. 사회적 협약에 따라 언어사용 방식이 일체화되면 의사소통 규칙만 통일되는 것이 아니라 지배질서의 헤게모니와 경제 시스템까지 내면화된다. 시는 이 같은 국민국가 시스템으로부터의 탈주라고 할 수 있다. 가령, 불은 뜨겁고 얼음은 차가운데 그 이분법을 일시에 해체하듯 ‘뜨거운 얼음’같은 이미지로 논리의 연결을 불연속적으로 점프하거나 산문적으로는 ‘눈이 내려서 나타샤가 생각난다’고 해야 할 것을 ‘나타샤라는 이름 때문에 눈이 나린다’로 전복을 시켜서 안정적이고 표준적인 통사 규율을 어긋내고 지배질서의 이데올로기 작동을 정지시킨다.

자동화된 정보체계를 초과화는 언어활동으로서의 시는 발상 자체가 경이로운 경우가 많다. “내 귀는 소라/ 바다를 늘 그리워한다”(「귀」 전문)고 노래한 장 콕토(Jean Cocteau)의 시는 즉각적인 반응을 일으키는 단 두 줄이 돌올한 이미지로 시원을 향한 향수와 동시에 그 그리움을 간직한 채 소라껍질처럼 건조하게 말라붙은 일상세계를 살아가는 삶의 면목들을 간명하게 드러낸다. “오리 모가지는/ 湖水를 감는다// 오리 모가지는/ 자꾸 간지러워.”(「湖水 2」전문)라고 노래한 정지용의 시는 호수의 상투적 인식을 뛰어넘는 관찰을 통해 호수를 실패처럼 감고 있는 오리라는 경이로운 이미지와 간지러움이라는 낯선 지각을 끌어낸다. 사물과 사물을 대하는 감각의 새 지평을 열어주는 신선한 착상력을 지닌 시들의 공통점은 뛰어난 발상 자체를 단순히 기발한 아이디어의 차원으로 남겨두지 않고 진동케하는 독자적인 영혼의 울림이 있다는 것이다.

이 영혼의 울림, 말하자면 영감(initation)은 시작법의 조명으로 밝힐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영감은 신화 속 세이렌의 노래와 같아서 섬을 통과하는 선원들을 바다로 뛰어들게 하는 광적인 매혹을 뿜어내는 것이 틀림없으나 소리가 아닌 문자로 시를 쓰는 현대 시인의 언어는 세이렌과의 대결을 통해 문명사회를 건설하고자 하는 오딧세우스의 이성의 돛대에 스스로를 결박한 자의 것이기도 하다. 세이렌의 후예이면서도 오딧세우스의 아들이기도 한 시인이 신화 속 대결을 넘어서는 방법을 뜻밖에 공자의 말에서 찾을 수 있다. “귀신을 공경하면서도 멀리하면 안다고 할 수 있겠다.”(논어, 『옹아편』) 앎이 무엇이냐고 묻는 제자 번지의 질문에 공자가 답한 것인데 시인이 영감을 대하는 태도라고 하겠다. 언제 올지 모르는 영감의 목소리를 마냥 태평하게 기다리고 있기보다 시인은 영감을 공경하기 위하여 멀리하는 거리두기의 역설을 온몸으로 살아내야 한다. 어떻게 거리두기를 할 것인가.

“『젊은 예술가의 초상』에서 스티븐 디달러스는 조이스의 ‘에피파니(epiphany)’라는 개념을 이렇게 설명한다. ‘조야한 말 혹은 몸짓이나 마음 그 자체의 주목할 만한 상태에서 갑자기 영적인 현시가 나타나는 것, 그것은 예술가들 자신에게 있어 가장 섬세하고 덧없는 순간들이기 때문에 이런 에피파니를 아주 조심스럽게 기록하는 것이 예술가들이 해야 할 일이라고 믿었다.’”2)

조이스 캐럴 오츠(Joyce Carol Oates)에 따르면 제임스 조이스(James Joyce)는 습작하는 과정 내내 대략 70개의 에피파니를 기록했다. 그 중 40개 정도가 『더블린 사람들』, 『율리시즈』 같은 소설의 재료가 되었는데 영적 현시로서의 에피파니는 강림을 받을 준비가 된 자에게만 오는 것이라고 설명을 덧붙이고 있다. 요컨대, 장인의 단계에 충실해야 영감을 품게 된다는 말이다. D.H. 로렌스(David Herbert Lawrence)는 그래서 무엇을 쓰고 있는지 채 파악하지도 못한 상태에서 기꺼이 한 작품 당 수많은 초고를 쓰길 게을리 하지 않았으며 『무지개』를 쓸 때는 천 페이지 정도를 폐기해 버렸다고 한다. 착상의 완만한 진행과 뒤죽박죽으로 얽힌 얼개를 언어화하는 가운데 더할 것은 더하고 버릴 것은 버리는 지난한 작업 속에서 하나의 작품이 완성되었던 것이다. 이런 사례들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착상이 사유의 산물이기도 하지만 많은 경우는 의미나 주제가 분명하지 않은 가운데 발화되는 우연성을 언어화 하는 과정의 산물이라는 점이다. 사유가 착상을 개진할 때는 대체로 시인이 훈련받은 사고체계의 범주에 머물기 쉬우나 먼저 살아가길 원하는 언어의 흐름을 따라가다 보면 미처 생각지도 못했던 발상이나 표현이 터져나오는 경우를 창작 현장에서 빈번하게 목도할 수 있다. 이렇게 해서 하나의 스타일이 생겨날 때 저마다의 작법은 장인의 기교를 넘어 영혼을 공명케하는 생명의 장식술이 된다. 파악할 수 있는 의미나 이미지, 주제의 영역과 완전히 파악할 수 없는 소리나 미묘한 분위기, 개념화하기 힘든 미세한 어조의 떨림이 함께 하는 시 장르는 특히 그렇다. 이해를 넘어서는 울림의 장르로서 시는 생각이 아니라 언어의 놀이와 유희에 대한 절대 긍정이다. 시인이기도 했던 인상파 화가 드가가 생각이나 시상이 부족한 건 아닌데 한 줄의 시도 쓰지 못하고 있다는 푸념을 하자 말라르메는 이렇게 충고했다. ‘시는 생각이 아니라 언어로 만드는 거야!’.

그동안 교육받은 의미나 이해의 강박, 이성 중심주의로부터 자유로워져라. 이해되지 않아도 사랑할 수는 있다. 사랑하면 이해하지 못할 것도 없다. 이해의 강박으로 사랑의 능력을 포기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자기 자신 외에는 다른 목적을 갖지 않은 활동으로서의 놀이가 그렇듯 사랑으로서 시의 유희는 현실의 구속과 지배적 질서에 대한 항의의 정신을 북돋운다. ‘상상력의 초보적 행위는 해체다’라는 보들레르의 말도 이런 맥락에서 나온 것이고, 선언문으로 발표되었으나 시라고 봐도 무방한 트리스탄 쟈라의 아래 글도 궤를 같이 한다.

다다시를 쓰기 위해

신문을 들어라.
가위를 들어라.
당신의 시에 알맞겠다고 생각되는 분량의 기사를 이 신문에서 골라내라.
그 기사를 오려라.
그 기사를 형성하는 모든 낱말을 하나씩 조심스럽게 잘라서 푸대 속에 넣어라.
조용히 흔들어라.
그 다음엔 자른 조각을 하나씩 하나씩 꺼내어라.
푸대에서 나온 순서대로
정성들여 베껴라.
그럼 시는 당신과 닮을 것이다.
그리하여 당신은 무한히 독창적이며, 매혹적인 감수성을 지닌, 그러면서 무지한 대중에겐 이해되지 않는 작가가 될 것이다.

- 트리스탕 차라, 「연약한 사랑과 씁쓸한 사랑에 대한 다다 선언」부분3)

다다이스트 차라(Tristan Tzara)는 1916년 스위스의 취리에서 열린 다다의 밤에 ‘다다’란 말은 아무 의미도 없으며 기계가 부딪쳐서 내는 소리를 발음 나는 대로 옮긴 것에 불과하다고 설명한 바 있다. 시의 단어나 문학의 용어에 대단한 의미를 부과했던 이전의 문학 전통에 반기를 든 것이다. 화가 마티스(Henri Matisse)가 말년에 종이오리기를 통해 형상의 의미로부터의 자유를 시도했다면 쟈라는 말 오리기를 통해 일상적 배열에 묶인 언어의 의미로부터의 탈출을 시도했다. 일상적 의미를 따라가서 신문의 언어배열에 순종하면 모험이나 뜻밖의 엉뚱한 사건들 그리고 의미 밖의 타자들을 만날 자유가 사라진다. 극단적인 부정과 파괴적인 전위가 지나쳐서 자신까지 부정하는 모순에 빠지고 말았지만 현실에 억눌린 의식의 자유와 해방을 위해 무의식이나 인간의 내면에 일어나는 환상을 즉흥적으로 기록하는 초현실주의의 ‘자동기술법’에 영향을 준 쟈라의 선언은 아직도 유효하다. 차라처럼 사전을 펼쳐서 말의 푸대 속에 ‘돼지, 사과, 모서리, 유리창, 기린, 모래, 울다, 밀어, 길, 코끼리, 쏘다, 촛대, 등신, 편지, 부끄럽다, 이야기, 코, 콧물, 버즘나무, 사다리, 기러기, 연못, 얼음, 수필, 종이, 페이지, 시들다, 감다, 물, 방탄조끼, 방탄소년단..................’ 같은 말들을 맥락 없이 뒤섞어 본다. ‘유리창은 물이다’라고 하면 유리창과 물 사이의 유사성과 차이성이 도드라지면서 나의 방은 연못이 되고 어항이 되고 얼음 호수도 되고 창가에 붙은 나는 물고기가 될 수 있다. ‘사과’와 ‘방탄조끼’를 연결하면 ‘방탄조끼를 입은 사과’ 같은 엉뚱한 조합이 생겨나는데 이 엉뚱함을 있을 수 있는, 수긍할 만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선 어떻게 그것이 가능한가에 대한 답으로서 매개항을 제시한다. 과수원의 농약살포나 해충들을 근거로 제시하면 문제는 해결된다. 그것이 착상에 대한 해석이다. 이성의 해석에 체험된 감각적 매개까지 더해지면 금상첨화다.(끝)

*약력

1998년 한국일보(시)와 국제신문(동시) 신춘문예에 당선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지은 책으로 시집 『호랑이 발자국』, 『목련 전차』, 『붉은빛이 여전합니까』 등이 있다. 조태일문학상, 노작문학상, 신동엽문학상, 임화문학예술상, 문학과의식 작품상, 현대시동인상 등을 수상하였다. 현재 노작홍사용문학관 관장으로 일하고 있다.

지리산과 나의 불편한 관계 / 손택수

지리산에 전화를 건다
아마도 진달래 수달래
꽃물결 짜하게 번져 있던
칠선 계곡 어디쯤,
아님 물안개를 속곳처럼 아슬하게 걸쳐서
보얀 살결이 드러날까 말까
넋을 잃기 좋았던 선녀탕 부근?

지리산에서 잃어버린 휴대폰에
전화를 걸어본다 나는
누군가와 늘 통화중이었지만
언제나 불통이었지
불통의 대가로 비싼 통화료만 냈어
그런데 그때 그 산속에서까지
통하지 않으면 안 될 소중한 누가
과연 내게 있기는 있었단 말인가

무인도는 가지 못하고
통화권이라도 이탈할 수 있는 자신을
확인이라도 하고 싶었단 말인가
지나가던 산토끼나 호기심 많은 곰이
사용법을 몰라 애를 먹고 있을지도 모를,
성질 급한 멧돼지의 배 속에 들어가서

가끔씩 들어오는 문자 메시지 소리로
꾸르륵거리고 있을지도 모를

휴대폰에 음성 메시지까지 남겨본다
아마도 산은 휴대폰 하나 때문에
통화권을 이탈해버린 자신이 믿어지지 않을 것이다
이탈한 적도, 통화를 거부한 적도 없이
우연하게 떠맡은 애물단지의 처리를 놓고
지끈지끈 골치가 아플 것이다

먼 곳이 있는 사람 / 손택수

걷는 사람은 먼 곳이 있는 사람
잃어버린 먼 곳을 다시 찾아낸 사람
걷는 것도 끊는 거니까
차를 끊고 돈을 끊고
이런저런 습관을 끊어보는 거니까
묵언도 단식도 없이 마침내
수행에 드는 사람
걷는 사람은 그리하여 길을 묻던 기억을 회복하는 사람
길을 찾는 핑계로 사람을 찾아가는 사람
모처럼 큰맘 먹고 찾아가던 경포호가
언제든 갈 수 있는 집 근처
호수공원이 되어버렸을 때를 무던히
가슴 아파하는 사람
올림픽 덕분에 케이티엑스 덕분에
더 멀어지고 만 동해를 그리워하는 사람
강릉에서 올라온 벗과 통음을 하며
밤을 새우던 일도 옛일이 돼버리고 말았으니
올라오면 내려가기 바쁜
자꾸만 연락 두절이 되어가는
영 너머 먼 데를 잃고 더 쓸쓸해져버린 사람
나는 가야겠네 걷는 사람으로
먼 곳을 먼 곳으로 있게 하는 사람에게로
먼 곳이 있어 아득해진 사람에게로


1) 테드 휴즈, 한기찬 역, 『테드 휴즈의 시작법』, 청하, 1990.

2) 조이스 캐럴 오츠, 송경아 역,『작가의 신념』, 북폴리오, 2005, 104쪽.

3) 트리스탕 쟈라, 앙드레 브르통, 송재역 옮김, 「연약한 사랑과 씁쓸한 사랑에 대한 다다 선언」 ,『다다·쉬르레알리슴 선언』, 문학과 지성사, 2000, 45쪽.
문경시민신문 기자  ctn6333@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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