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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경문협(회장 김종호), 제10차 문경문학아카데미 개최
윤제림 시인 초청 강연
문경시민신문 기자 / ctn6333@hanmail.net 입력 : 2020년 11월 28일(토) 1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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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앞줄 우측에서 두번 째 분이 윤제림 시인 | ⓒ 문경시민신문 | | 문경문협(회장 김종호)은 지난 21일 오후 2시부터 4시까지 문경시립중앙도서관 2층 어학강의실에서 윤제림 시인을 초청해 '시심과 동심'이란 주제로 제10차 문경문학아카데미를 개최했다.
다음은 윤제림 초청 강사의 강의 내용이다.
윤제림의 시심 동심
2020 가을 문경
시심
이명(耳鳴)을 생각함
나의 귀에서는 소리가 난다. ‘내 귀는 소라껍질’식의 시적 수사가 아니라, 이명(耳鳴)이 있다는 말이다. 글자 그대로 내 귀는 노상 울고 있다. 오래된 증상이다. 이십대에 시작되었으니 삼십년 쯤 된 병통이다. 워낙 오래 달고 다녀서 이제는 물소리나 바람소리쯤으로 여기고 산다. 그런다고 하여, 어찌 아니 불편하랴. 모른 체하고 무시해서 사라진다면 무슨 걱정이랴.
내 귓속의 물과 바람도 자연의 그것을 고스란히 닮았다. 천(千)의 소리와 얼굴을 지녔다. 맑은 아침의 연못물이다가, 삽시에 큰 바다의 격랑이 된다. 버드나무 가지나 간질이는 미풍이다가, 냅다 토네이도를 닮은 광풍이 된다. 세상 모든 병증(病症)의 포로들이 그렇듯이 이명에 휘둘리며 사는 사람들은 입을 모은다. “겪어보지 않으면 모른다.”
병은 자랑하라 했지만 이것은 그러기도 쉽지 않다. 설명이 힘이 드니 하소연도 쉽지 않고, 해봤자 이해나 동정을 받기도 어렵다. 하여, 대개의 환자들은 내색을 하지 않는다. 동병(同病)의 사람들을 만나도 별로 얻을 게 없다. 그저 미지근한 위로의 말과 시원찮은 처방 몇 가지를 주고받을 뿐이다.
그런데, 최근에 새로운 사실을 알았다.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이명을 앓고 있다는 것과 이 병이 아주 옛날부터 존재했다는 것이다. 연암 박지원의 글(공작관문고자서;孔雀館文稿自序)에도 이명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어린 아이가 마당에서 놀고 있는데, 그 귀가 갑자기 우는지라 놀라 기뻐
하며 가만히 옆의 아이에게 말하였다. “얘! 너 이 소리를 들어보아라.
내 귀가 우는구나. 피리를 부는 듯, 생황을 부는 듯, 마치 별처럼 동그랗
게 들려!” 옆의 아이가 귀를 맞대고 귀 기울여 보았지만 마침내 아무 소
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러자 이명이 난 아이는 답답해 소리 지르며 남이
알아주지 않음을 한탄하였다.
『비슷한 것은 가짜다』, 정민, 태학사, 45쪽
글쓰기의 진정성을 설파하는 비유인데, 연암은 ‘이명’을 ‘코골이’와 짝을 지워서 설명한다. 이명은 자신만 알고 아무도 몰라주는데, 코골이는 세상 사람이 죄다 알건만 본인만 모른다는 얘기다. 시 쓰기가 여기서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저만 아는 소리나 주워섬겨 놓고 못 알아듣는다고 세상을 나무라는 이들이 있고, 누가 보아도 시시한 글이나 써놓고 혼자서 우쭐거리는 이들이 있다. 물론, 시인이란 존재는 대개 이 두 가지 유형이 한 몸에 깃든 사람이다.
어쩌겠는가, 저 너머도 보이고 헛것도 보여서 시인인 것을. 환청도 들리고 귀신도 들려서 시인인 것을. 반듯하게 보이는 것보다는 구겨져 보이는 것이 많아서 시인인 것을. 바로 서 있는 것보다는 거꾸로 서 있고, 빛나는 바깥보다는 침침한 속이 더 잘 보여서 시인인 것을. 잘못 읽고 잘못 듣고 잘못 보고 잘못 짚으니 시인인 것을. 온 세상 사람이 옳다 그르다 온 말을 하여도 제 하는 짓이 기꺼워 그치지 못하는 것을. 세상에서 제일 좋은 시는 제 시인 것을.
생각느니, 시인은 오독(誤讀)과 오해(誤解)와 오인(誤認)의 선수다. 그렇다면, 시는 오기(誤記)다. 나는 1987년 문단에 나올 때, 내 시를 받아쓰기와 다르지 않은 일이라고 밝힌 바 있다. 내가 시인일 수 있는 이유는 내게 받아 적으라고 시를 불러주는 이웃을 많이 두고 있기 때문이라 말했다. 물론 나의 받아쓰기 점수는 엉망이다. 하지만, 그런 까닭에 나의 시는 시로서 대접을 받는다.
미당 선생의 일화가 떠오른다. 만년의 어느 날 관악산을 바라보던 사모님께서 무심코 던진 말을 냉큼 받아 시로 옮기셨다는 이야기다. 그 무렵, 선생은 이런 말씀을 자주 하셨단다. “요새는 이 사람이 시인이고, 나는 대서(代書)쟁이여!”
선생께 머리 숙여 여쭙고 싶은 생각이 일어난다. “선생님, 시인은 원래부터 대서쟁이가 아닐까요? 누군가 시키는 것을 대신 받아쓰는 사람, 그렇지요? 그런데 불러주는 그대로는 아니고 제멋대로 받아쓰는...”
그것은 내 오래된 생각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다섯 번째 시집의 서문을 이렇게 썼던 것이다.
내 받아쓰기 공책을 보고
바람과 나무, 아이와 노인, 귀신과 저승사자
모두 한 마디씩 하고 간다.
“내가 이렇게 말했나?”
“내 이야기는 이게 아닌데.”
“잘못 들었군.”
귀가 어두워져서 걱정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어두워져가는 귀가 걱정스러운 것만은 아니다. 이명이 걱정스럽지만은 않은 까닭이기도 하다. 놓치는 소리가 많아서, 잘못 알아듣는 말들이 많아서 나는 아직도 시인이다.
동심
탄금대에서 왔습니다
글 쓰는 세상에 나온 지, 어느 새 30년이 훌쩍 넘었습니다. 1987년부터 헤아리기 시작한 햇수지요. 그해에 두 가지 상을 받았습니다. 3월에는 동시로 『소년중앙』 문학상 수상자가 되고, 가을에는 『문예중앙』 신인문학상 시 부문 당선자가 됐습니다. 그러니까 저는, 동시작가와 시인이란 이름을 같은 해에 얻었습니다.
그런데, 동시쓰기는 금세 시들해졌습니다. 직장 일은 한창 분주하고, 생활에는 잔뜩 때가 끼어서 ‘동심’의 안경을 찾아 쓰기 어려웠습니다. 적당한 핑계꺼리도 점점 늘어갔습니다. “발표할만한 지면도 없고, 원고 달라는 사람도 없고....” 소년잡지들과 몇 되지 않던 아동문예지들도 하나 둘, 자취를 감추던 시절이었습니다.
일 년에 서너 편 쓰고, 한두 편 발표하는 것이 고작이었습니다. 그렇게 삼사년이 흘렀을까요. 저는 동시 세상에서 ‘미아’가 되었습니다. 아무도 저를 찾지 않았고, 저 역시 되돌아갈 길 찾기를 단념했습니다. 문득문득 미안한 마음이 일기도 했습니다. 저 때문에, 아랫자리로 밀려난 사람 생각이 제일 많이 났습니다.
부끄럽기도 했습니다. ‘누군가를 밀치고 나와서, 열심히 쓰지도 않는 것은 얼마나 죄스러운 일인가. 남에게 양보할 수도 있는 밭을 욕심껏 차지하고는, 씨도 뿌리지 않는 농부와 다름없지 않은가.’ 저를 뽑아주신 잡지사와 심사위원 선생님들(손동인, 박경용)께도 면목이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늘 ‘글 농사’로 정신이 없었습니다. 다른 밭에서 다른 작물 심고 가꾸기에 바빴습니다. ‘시의 밭’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수확의 기쁨이 컸습니다. 문단에 나온 이듬해에 처녀시집을 내보였고, 분에 넘칠 만큼 많은 청탁을 받고 즐겁게 썼습니다. 다시 이태 뒤엔 두 번째 시집을 펴냈습니다.
이런저런 이유로 ‘동시 밭’은 묵정밭이 되어갔습니다. 이십여 년을 돌보지 않았더니, 잡초만 무성해졌습니다. 마음이 편했을 리 없지요. 언제부턴가, 갓난아기를 집에 두고 나온 아낙네처럼 불안해졌습니다. 칭얼거리다가 끝내 터져버리고 마는 아이의 울음소리도 환청처럼 들렸습니다.
도드라지게 예쁜 동시 한 편을 본 날이면, 제 동시의 씨앗과 묘목들의 안부가 궁금해졌습니다. 그때마다 ‘나도 언젠가 저런 농사를 지어야지’하며 다짐을 했지만, 금세 잊곤 했습니다. 제 그런 사정을 진작 알아챈 선배가 있었습니다. 땅에서의 글쓰기를 마치고, 이제는 하늘나라에서 동화를 쓰고 있는 사람입니다.
이름을 말할 때 ‘채송화 채, 봉숭아 봉’이라고, 또렷이 힘주어 발음하던 사람. ‘동심이 세상을 구원한다’고 굳게 믿던 사람. 「오세암」의 정채봉입니다. 한 번은 그가, 자신의 책에다가 이렇게 써서 주었습니다. “이제 보석글을 풀어놓으시오.” 언뜻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무슨 뜻일까 고개를 갸웃거렸습니다.
‘나는 이미 시인이고, 열심히 글을 쓰며 살고 있는데. 보석글을 풀어놓으라니?’ 며칠을 이리 저리 굴리면서, 형의 뜻을 짚어보려 애를 썼습니다. ‘내가 쓰고 있는 글들이 시시하다는 건가? 더 갈고 닦아서 눈부신 시를 쓰라는 뜻인가?’ 둘 다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왜 동시를 쓰지 않느냐는 물음이면서, 쓰라는 명령이었습니다.
언젠가 형에게 들은 이야기가 포개지면서 의문이 풀렸습니다. “처음 어린 왕자를 읽던 날이었어. 처음엔 누워서 읽고 있었는데, 저절로 일어나 앉게 되더군. 앉아서 읽다보니, 나도 모르게 무릎을 꿇고 있더군. 그리곤 나도 이런 작품 한 권 남기고 죽자는 결심을 했지. 글자 하나하나가 보석인 글.”
동화작가 정채봉이 말하는 보석글은 그런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바로 동시의 나라로 돌아가지 못했습니다. 대신에 시를 ‘보석글’로 써보려 했습니다. 극작가 ‘이오네스코’(E. Ionesco)의 도움이 컸습니다. “지금 막 지구에 도착한 외계인의 눈으로 보라.” 어린이의 시선으로 보라는 것과 다르지 않은 주문이었습니다.
세상에 처음 오던 날의 풍경 속으로 돌아가 보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 무렵의 제 시들은 어쩌면 ‘동시의 기운’으로 이뤄진 것인지도 모릅니다. 받아쓰기하듯 시를 썼습니다. 남들보다 조금 큰 귀로, 좀 더 많은 이야기를 들으려 노력했습니다. 주어진 인생 안에서 어린이로서의 시간을 최대한 늘려보려는 욕심이었습니다.
저는 그저 좋은 이웃을 많이 두어서 시인인지도 모릅니다. 말을 걸면, 선뜻 응답해주는 사람과 짐승과 식물, 그리고 사물들 덕에 저는 시인입니다. 저한테 시와 동시는 같은 물건입니다. 어린이가 못 알아듣겠다 싶으면 시로 쓰고, 누군들 모르랴 싶으면 동시로 옮깁니다. 제 시의 가게는 ‘연령 제한’이 없습니다. 할머니 할아버지와 손자 손녀가 함께 드나들길 기대합니다.
요즘은 동시 쓰는 일이 훨씬 즐겁습니다. 생각의 광물을 캐내어 말과 글의 보석을 만드는 시간입니다. 제가 만든 물건이 누군가의 삶에서 빛나는 순간을 생각하면 가슴이 벅차오릅니다. 반지가 되어 손가락을 만나고, 팔찌가 되어서 손목과 어울리겠지요. 가슴에 놓이면 단추나 브로치가 될 것입니다.
이 행복한 노동을 오랫동안 잊고 살았습니다. ‘이안’ 시인이 고맙습니다. 시인 윤제림이 동시를 쓰기도 하는 사람이란 것을, 다시금 일깨워준 까닭입니다. 충주에서 걸려온 그의 전화 한 통이 흐려진 초심을 자극했습니다. 사십여 년 전, 탄금대의 기억을 떠올리게 했습니다. 잃어버린 고향으로 가는 길을 가리켜주었습니다.
대학 일학년 때, 혼자 떠난 여행길이었습니다. 남한강이 우륵의 가야금 소리를 내며 흘러가는 강마을. 그곳에서 ‘권태응’ 선생을 만났습니다. ‘감자꽃 노래비’ 아래서, 「감자꽃」 노래를 불렀습니다. 청주 교동초등학교 아이들과 함께였습니다. 그 틈에 끼어 앉아서 저도 어린이가 되었습니다.
기차를 타고 청주까지 따라갔습니다. 무척 아름다운 하루였습니다. 돌이켜보면, 제 동시문학의 첫 장면입니다. 아이들을 데려온 선생님으로부터 많은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알고 보니, 친구 누나와 동창! 동화작가 유영선 선생이었습니다. 그 인연으로 당신의 교실까지 찾아가 어린이 세계를 배우기도 했습니다.
그날 만난 어린이 한 명의 이름도 아직 잊히지 않습니다. ‘우민하’. 그 이름을 넣은 시를 써서 대학신문에 발표한 일도 있었습니다. 이 다음에 시인이 되겠다던 아이였습니다. 시인이 되었건 아니건, 시인의 마음으로 살고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오래된 기억일수록 단단한 자물쇠가 채워지는 까닭입니다.
동시의 출발점으로 돌아가 보고 싶어집니다. 첫 작품을 쓰던 마음의 풍경을 새삼 새겨보려는 뜻입니다. 1987년 봄, 『소년중앙』 문학상 당선소감을 다시 읽어봅니다.
“자주꽃 핀 건 자주감자/파보나 마나 자주감자
/하얀 꽃 핀 건 하얀 감자/파보나 마나 하얀 감자.”
어느 해 여름인가 충주를 지나다 탄금대에 들렀을 적에, 권태응 선생의 감자꽃 노래비 아래서 그 노랠 부르던 소년이 생각난다. 시인이 되겠다던 소년. 지금은 아마 대학생이 되었을 그가 보고프다.
이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마음만을 지니는 어린이들, 그 마음은 어디서 비롯되는 것일까? 바람과도 악수를 나눌 줄 알고, 산을 보면 고개 숙이고, 강물과 만나면 인사하며, 나무에게도 절을 하는 아이들. 아무에게나, 아무렇게나 인사하는 어른인 내가 그 순수한 마음을 헤어낼 수 있을까.
생각이 아름다운 이들을 나는 부러워한다. 그들에게 고개 숙인다. 이 맵찬 세상에서 쪼가리 꿈이나마 끝끝내 버리지 않는 사람들을, 나는 사랑한다. 그러한 사람들의 줄 맨 끄트머리에라도 서고 싶다.
동시라는 걸, 혹은 시라는 걸 굳이 갈라가며 생각하고 싶진 않다. 내 할머니 할아버지가, 내 어머니 아버지가 그런 걸 가려낼 줄 몰랐듯이. 재미있는 이야기가 담긴, 그러면서도 어여쁜 시를 지어내고 싶다. 아니 그냥 받아쓰고 싶다. 그런 이야기들 쯤이야 지천에 널렸을 테니까.
윤제림 시선
윤제림 시인
충북 제천에서 태어남. 동국대 국문과, 언론대학원
카피라이터로 일하면서 서울예술대학교 광고창작과 교수로 재직 중(윤준호)
‘한국방송광고대상’ ‘중앙광고대상’ 등 국내외 많은 광고상 수상
시집 『삼천리호 자전거』 『미미의 집』 『황천반점』 『사랑을 놓치다』 『새의 얼굴』
동시집 『거북이는 오늘도 지각이다』
기타 『카피는 거시기다』 『고물과 보물』 『젊음은 아이디어 택시다』
재춘이 엄마
재춘이 엄마가 이 바닷가에 조개구이집을 낼 때
생각이 모자라서, 그보다 더 멋진 이름이 없어서
그냥 "재춘이네"라는 간판을 단 것은 아니다.
재춘이 엄마뿐이 아니다
보아라, 저
갑수네, 병섭이네, 상규네, 병호네.
재춘이 엄마가 저 간월암(看月庵) 같은 절에 가서
기왓장에 이름을 쓸 때,
생각나는 이름이 재춘이 밖에 없어서
"김재춘"이라고만 써놓고 오는 것은 아니다.
재춘이 엄마만 그러는 것이 아니다
가서 보아라, 갑수 엄마가 쓴 최갑수, 병섭이 엄마가 쓴 서병섭
상규 엄마가 쓴 김상규, 병호 엄마가 쓴 엄병호.
재춘아, 공부 잘해라!
지하철에 눈이 내린다
강을 건너느라
지하철이 지상으로 올라섰을 때
말없이 앉아있던 아줌마 하나가
동행의 옆구리를 찌르며 말한다
눈 온다
옆 자리의 노인이 반쯤 감은 눈으로 앉아있던 손자를 흔들며
손가락 마디 하나가 없는 손으로
차창 밖을 가리킨다
눈 온다
시무룩한 표정으로 서 있던 젊은 남녀가
얼굴을 마주 본다
눈 온다
만화책을 읽고 앉았던 빨간 머리 계집애가
재빨리 핸드폰을 꺼내든다
눈 온다
한강에 눈이 내린다
지하철에 눈이 내린다
지하철이 가끔씩 지상으로 올라서주는 것은
고마운 일이다
맑은 날
구름도 바람도 먼 길을 떠나서
하늘도 골짜기도 텅 빈 겨울날
산속의 가가호호
창문 하나 없는데도 눈이 부셔서
햇살이 지붕을 두드리는 소리 시끄러워서
누워 못 있겠네
궁금해 못 있겠네
모두들 산을 내려간 날
주차장도 관리사무소도 텅 빈
공원묘지,
얼었던 개울물도 살살
울타리 밑을 빠져나간 날
산비탈을 오르는 치마저고리 한 벌을 보고,
뉘시오, 겅겅
아무도 없다오, 겅겅겅
산지기 누렁이만 두어 번 짖는 날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기어선지 걸어선지
ㄱ자의 사람 하나
빈 집을 다녀간 날
날이 하도 좋아서
모두 집을 비운 날,
당신은 옛집에 다녀오겠다고 내려간 날,
그 맑은 날
사랑을 놓치다
...... 내 한때 곳집 도라지꽃으로
피었다 진 적이 있었는데,
그대는 번번이 먼 길을 빙 돌아다녀서
보여주지 못했습니다, 내 사랑!
쇠북 소리 들리는 보은군 내속리면
어느 마을이었습니다.
또 한 생애엔,
낙타를 타고 장사를 나갔는데, 세상에!
그대가 옆방에 든 줄도
모르고 잤습니다.
명사산 달빛 곱던,
돈황여관에서의 일이었습니다.
김종호 詩
금생 바로 전
과수원집 머슴 살 때
흙냄새 가득한 방을
훔쳐보는 그대 숨소리를
몰랐습니다
배꽃에 내려앉은 달빛
환하고
옹달샘 넘치는 소리
더욱 크게 들리던
밤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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