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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리 시인, 2018년 4차(제25회) 문경문학아카데미 특강
불편의 시학
문경시민신문 기자 / ctn6333@hanmail.net 입력 : 2018년 04월 15일(일) 1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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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문경시민신문 | | 우리나라 유명 시인인 이규리 시인이 14일 오전 10시 30분부터 낮 12시 30분까지 문경시립중앙도서관 어학강의실에서 '불편의 시학'이란 주제로 2018년 4차(제25회) 문경문학아카데미 특강을 실시했다.
‘문학으로 감성을 충전하는 날’로 개최되는 ‘2018 문경문학아카데미’는 지난 1월 13일 제1회를 시작으로 연말까지 총 12회 실시된다.
|  | | ⓒ 문경시민신문 | |
불편의 시학
이 규 리 시인
-들어가면서
이렇게 화사한 봄날, 저는 어울리지 않게도 ‘불편’과 ‘슬픔’이란 단어로 여러분을 찾아왔습니다. 그러나 죄송해 하지 않으려 합니다. 왜냐하면 이 두 단어의 숨은 뜻을 이야기 하는 것이 이 강의의 테마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불편보다는 편안을, 슬픔보다는 기쁨을 꿈꾸어 왔지요. 그건 우리의 사고가 긍정적이어서가 아니라 획일적이어서라는 생각이 듭니다. 시는 고정관념을 깨뜨리고 익숙한 것을 거부하는데서 시작하지요. 그 시각은 기존의 관점에 대한 일종의 저항이기도 한데요. 그런 의미에서 이 시간에는 ‘불편’과 ‘슬픔’을 좀 더 다른 방식으로 접근해 보려 합니다.
1. 불편
불편의 시학은 불편을 정의하는 시학이 아니라 불편의 선의적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시학입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불편을 피하려 애써 왔고 불편을 없애는 일에 노력해 왔습니다. 오랜만에 만나서 하는 인사말도 “요즘 편안하십니까?”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편안한가요? 시대를 막론하고 인간은 병들어 있고 우리의 삶은 누추합니다. 그건 어떤 제반 요건에도 불구하고 인간 자체가 욕망의 덩어리이며 삶 자체가 부조리하기 때문이지요. 그 안에서 편안하다면 그건 도덕적이지도 윤리적이지도 않은 일이 아닌가 하는 생각입니다.
그렇다면 불편의 덕목은 과연 무어라 말할 수 있을까요? ‘천강성이란 별은 길방(吉方)을 비추기 위해 자신은 흉방(凶方)에 위치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여기서 흉방의 자리, 자신이 불편한 자리에 선다는 이야기는 타 혹은 타인을 편한 자리에 둔다는 뜻이 되겠지요. 시를 쓰는 일이 그러하다고 여깁니다. 어떤 이유로든 시인은 대상에게 군림하여서는 안 되며 멋대로 대상을 왜곡해서도 안 되지요. 시인에게 대상은 언제나 주인입니다. 더 낮고 누추한 곳에서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듣고 말해야 하는 것이 시인의 역할일 것입니다. 그러할 때 대상은 자신의 내부를 열어주고 우리는 우리가 미처 보지 못한 대상의 본질에 다가서게 되지요.
어느 한 젊은 시인도 자서에서 이렇게 적고 있어요.
불편하지 않은 것은
살고 있는 것이 아니리니
마음에
휘몰아치는 눈발을 만나지 않는다면
살고 있는 것이 아니리니.(이병률)
이렇게 시의 자리는 불편의 자리이며 시인의 자리 역시 불편의 자리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불편마저 껴안는 자리여야 합니다. 불편은 피해야 할 자리가 아니고 거부해야 할 자리는 더욱 아니겠지요. 그 관점은 편안할 때 볼 수 없는 것들을 보게 해 주며 그렇게 쓰인 시는 우리에게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힘을 주게 됩니다. 아니라면 우리가 왜 그토록 시에 매달려 있겠는지요. 또한 그 힘이 아무런 노력 없이 나올까요. 다가가려는 노력, 이해하려는 노력, 사랑하려는 노력, 이 노력들 역시 편안하게 오는 건 아닐 겁니다. 꽃이 올 때 그토록 미친 듯 부는 바람과 살 추위를 견디는 생살들의 시간이 그러합니다. 상대에게 칼을 겨누지 않으며 자신을 낮은 자리에 두고 고통을 감내하는 자리가 불편의 자리입니다. 그렇다면 시는 불편의 자리에서 쓰는 불편을 위한 성찰이겠지요.
그런데 시가 우리에게 견딤과 인내만 강요하는 건 아닙니다. 새로운 사물들과의 마주침으로 인해 뜻밖의 기쁨을 주며 모르고 있던 사실에의 깨우침으로 신선한 자각을 선물해 주기도 합니다. 편안함으로는 결코 느낄 수 없는 경험, 편안함으로는 보이지 않는 세계, 즉 ‘불편의 시학’은 나와 너, 그들과 우리라는 관계의 미학까지 포함합니다. 불편해서 저는 당신을 더 잘 알게 되었고 불편하므로 저는 세상을 깊숙이 보게 되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뭔가 어제보다 달라진 자신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불편으로 획득하는 보상인 셈입니다.
사물이나 대상을 사랑하는 일은 거기서 시작되지요. 그렇다 하더라도 그 자체가 인간의 고통을 해결해주거나 삶의 아픔을 치유해주는 건 아닙니다만 삶을 정리하고 정화하게 해주거나 인간을 잘 이해하는 힘을 줍니다. 그 힘으로 우리는 혹은 시인은 기꺼이 지금보다 더 어려운 시간을 견디어 갈 의지를 지니며 더 가치 있는 일이 무엇인지 판단하는 능력을 알게 됩니다. 그건 매우 소중한 인식이라 하겠습니다.
불편에서 좀 더 나아가 저는 아닐 불(不)자를 좋아합니다. 늘 불안하고 불리한 쪽이고 불편(不便)을 마다하지 않으며 부족에 시달리고 불가능한 일에 무한 매력을 느낍니다. 그런 생각을 품어서인지 그 요소들이 3시집에 많이 나타나 있습니다. 아닐 불(不)자야 말로 저를 먹여 살린 셈입니다. 뻔하고 익숙한 것을 버린, 말하자면 일종의 낯섦을 따라나섰다 할까요. 그것이 제 문학의 근간을 이룬 저항이며 내면이라 하겠습니다. 또한 시에 치유기능이 있음을 믿는데 3시집 이후 저는 불(不)자를 친근하게 보게 되었습니다. 다시 말해 불(不)자를 사랑하게 되었다고 할까요.
예를 들면 <불안도 꽃>이라는 시에서 ‘불안’이 그러하고 <특별한 일>에서 ‘불리’가 그러하고 또 <펭귄시각>에서의 ‘불편’이, <커다란 창>,<꽃피는 날 전화를 하겠다고 했지요>에서의 ‘불가능’에 대한 생각이 그러합니다. 시가 아니면 다가가지 못하였을 인식에 그나마 한 걸음 다가갔다면 문학이 저를 인도하였다고 생각합니다. 그러한 인식은 시와 삶에 대한 신뢰를 주었습니다. 불편의 시학이란 다름 아닌 삶의 내밀함을 찾아가는 열쇠였던 것이지요.
예시 1
특별한 일
도망가면서 도마뱀은 먼저 꼬리를 자르지요
아무렇지도 않게
몸이 몸을 버리지요
잘려나간 꼬리는 얼마간 움직이면서
몸통이 달아날 수 있도록
포식자의 시선을 유인한다 하네요
최선은 그런 것이에요
외롭다는 말도 아무 때나 쓰면 안 되겠어요
그렇다 해서
특별한 일이 일어나지는 않아요
어느 때, 어느 곳이나
꼬리라도 잡고 싶은 사람들 있겠지만
꼬리를 잡고 싶은 건 아니겠지요
와중에도 어딘가 아래쪽에선
제 외로움을 지킨 이들이 있어
아침을 만나는 거라고 봐요
펭귄시각
펭귄의 천적은 바다표범이다
바닷 속 사정이 궁금한 펭귄들
서로 물에 먼저 들지 않으려
불룩하게 눈치만 살필 때
한 놈이 슬쩍 다른 놈을 민다
얼떨결에 무방비가 틱 미끄러져 든다
그때 내가 그녀를 밀었을까
그녀는 밀렸다 생각했을까
시달리다보면 누굴 밀었는지 착각에 들고
정말 밀었다고 믿기에 이른다
펭귄의 뱃속엔 물결과 물결이
저 안엔 파도치는 밤과 낮이
천적의 천적으로 살아있는 동안
남극의 빙하는 다 녹을까
그럴까
궁금하다
그때 빠져든 펭귄은 실족이다 말을 했을까
커다란 창
창이 큰 집에 살면서 되려 창을 가리게 되었다
누가 이렇게 커다란 창을 냈을까
이건 너무 큰 그리움이야
창이 건물의 꽃이라지만
나는 누추하여 나를 넓히는 대신
창을 줄이기로 한다
간절히 닿고 싶었던 건 어둠이었을까
모순의 창
제 안에 하루에도 여러 번 저를 닫아거는 명암이 있어
어느 날은 그 창으로 꽃을 보았다 말하겠지
어느 날은 그 창으로 비참을 보았다 말하겠지
우리가 보려는 건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것인데,
왜 창 앞에 자주 저를 세웠을까
돌아보면 거기 누군가의 눈이 있었다고 말해도 될까
누군가는 나를 다 보았겠지만
해부한 개구리처럼 내 속을 다 보았겠지만
창이 왜 낮엔 밖을 보여주고 밤엔 자신을 보게 하는지
그리운 것들은 다 죽었는데
누가 이렇게 커다란 창을 냈을까
꽃피는 날 전화를 하겠다고 했지요
꽃피는 날 전화를 하겠다고 했지요
꽃피는 날은 여러 날인데 어느 날의 꽃이 가장 꽃다운지
헤아리다가
어영부영 놓치고 말았어요
산수유 피면 산수유 놓치고
나비꽃 피면 나비꽃 놓치고
꼭 그날을 마련하려다 픙선을 놓치고 햇볕을 놓치고
아,
전화를 하기도 전에 덜컥 당신이 세상을 뜨셨지요
모든 꽃이 다 피어나서 나를 때렸어요
죄송해요
꼭 그날이란 게 어디 있겠어요
그냥 전화를 하면 그날인 것을요
꽃은 순간 절정도 순간 우리 목숨 그런 것인데
차일피일. 내 생이 이 모양으로 흘러온 것 아니겠어요
그날이란 사실 있지도 않은 날이라는 듯
부음은 당신이 먼저 하신 전화인지도 모르겠어요
그렇게 당신이 이미 꽃이라
당신 떠나시던 날이 꽃피는 날이란 걸 나만 몰랐어요
그러나 좋아하지 않는 불(不)자도 있습니다. 불신(不信), 부정(不正), 불법(不法), 부실(不實)이 그것이인데요. 그렇다면 앞서 서술한 불(不)과 뒤의 불(不)의 차이는 무얼까요? 시는 칼날의 끝을 자신에게 겨누는 일이라고 앞에서 말씀드렸습니다. 피 흘리고 상처 받는 쪽은 상대가 아니라 시인 자신이어야 한다는 말씀 말이지요. 그렇게 볼 때 앞의 불(不), 즉 불안 불편 불리 부족 불가능은 칼날을 자신에게로 겨누고 있는 것이며 뒤의 불(不), 즉 불신 부정 부실 불법 등은 칼끝이 상대를 향해 있는 것입니다. 그 차이입니다. 문학의 자리는 어디여야 할지 자명하지요.
2. 슬픔
불편과 함께 슬픔이란 명제도 우리는 피하려 해 왔습니다. “슬퍼하지 마라, 되도록 슬픔을 잊고 살아라”라는 말이 위로인 줄 알고 있었습니다. 저는 반대로 말합니다. “좀 더 슬퍼하세요, 혹은 슬픔을 떠나려 마세요”라고 말입니다. 슬픔을 이해하는 사람은 난폭하지 않습니다. 한창 이슈가 되는 직장이나 가정 내 폭력이나 성폭행, 그리고 사회적인 폭력, 그리고 무차별 테러까지 우리는 그 안에서 늘 시달리며 살고 있습니다. 이것 모두 칼끝을 상대에게 겨누고 있는 것들이지요. 폭력(暴力)을 없애지 못한다면 폭력의 반대를 이용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폭력(暴力)의 반대말이 무어라고 생각하십니까?
‘비폭력’ 혹은 ‘사랑’이라 대답하는 이도 있을 텐데요. 저는 폭력의 반대말을 ‘슬픔’이라 하고 싶습니다. 폭력이 칼을 상대에게 겨누는 일이라면 슬픔은 칼을 자신에게 겨누는 일이겠지요. 종교를 강요된 선(善)이라 한다면 슬픔은 자발적 희생이며 미(美)입니다. 슬픔이 숭고한 것은 어떤 경우에도 자신을 정화하여 일의 사안을 이해하려는 태도 때문일 거예요. 얼마 전 소설가 한승원의 인터뷰를 보았는데요. 그가 딸인 한강에게 어릴 때부터 강조한 말이 있더군요. “슬픈 눈빛을 지녀라”라는 것이었는데, 그러면서 “눈빛이 슬퍼야 세상을 꿰뚫어 볼 수 있다”라고 부언하고 있습니다.
개인의 이기와 욕망으로 빚어지는 일련의 비극적인 상태들도 슬픔의 힘으로 다스리는 것이 유효하다고 생각합니다. 많은 경우 인간을 감동하게 하는 것은 질책과 나무람이 아니라 슬픔과 눈물로 다가간 이해란 것을 기억합니다. 저는 슬픔의 힘을 믿습니다. 슬픔의 힘은 매우 강합니다. “도대체 당신이 어떻게 그럴 수 있어?”라는 말 대신 “당신을 생각하면 나는 슬퍼”라는 말을 한다면 상황은 종료됩니다. 애이불비(哀而不悲), 애이불상(哀而不傷)라는 말도 있듯이 미 중에 가장 아름다운 미도 비애미가 아닌가요? 슬픔이야말로 가장 맑은 물질입니다. 불을 끄기 위해 맞불을 놓듯이 슬픔도 슬픔으로 씻어야 한다고 여깁니다. 이 어려운 시대에 시인이 할 일은 슬픔을 되찾는 일일 것입니다.
많은 물
비가 차창을 뚫어버릴 듯 퍼붓는다
윈도브러시가 바삐 빗물을 밀어낸다
밀어낸 자리를 다시 밀고 오는 울음
저녁 때쯤 길이 퉁퉁 불어 있겠다
차 안에 앉아서 비가 따닥따닥 떨어질 때마다
젖고, 아프고,
결국 젖게 하는 사람은
한때 비를 가려주었던 사람이다
삶에 물기를 원했지만 이토록
많은 물은 아니었다
윈도브러시는 물을 흡수하는 게 아니라 밀어내고
있으므로
그 물들은 다시 돌아올 것이다
저렇게 밀려났던 아우성
그리고
아직 건너오지 못한 한 사람
이따금 이렇게 퍼붓듯 비 오실 때
남아서 남아서
막무가내가 된다
3. 그리고 아름다움
불편함을 피하려 말고 슬픔을 벗어나려 않으며 그것들을 오히려 자산으로 삼으면 좋겠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러한 방식이 궁극적으로 아름다움을 향하는 일이라는 것이지요. 마지막으로 현실에서 수없이 맞닥뜨리는 현상 가운데 우리는 어떤 생각과 판단을 해야 하는 것일까 생각해 봅니다. 몇 가지 사례의 이야기 가운데 스스로 우리는 어떤 선택 앞에 서는지, 대상을 아끼는 방식은 과연 어떤 것인지 더듬어보기로 할까요. 중요한 순간이나 지극한 순간에 하는 선택이 그 사람을 말해준다고 압니다. 이것은 시적 사유에 관한 일입니다.
a. 브로콜리나무의 비극
b. 캐나다 황금 가문비나무
c. 미국 캘리포니아 파인트리
d. 2008년 대학로 이화마을의 벽화,
e. 영화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에 나오는 전설적인 사진작가 숀 오코넬의 이야기
간혹 “문학이 세상을 바꿀 수 있느냐”라는 질문을 하는데 적어도 “자신을 바꿀 수는 있다”고 대답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충분히 당신을 바꿀 수도 있습니다.
|  | | ↑↑ 걸어가는 사람 | ⓒ 문경시민신문 | | 얼마 전 알베르토 자코메티의 작품전에 다녀왔는데요. 자코메티는 인체의 형상에서 살을 붙여나가는 게 아니고 떼어나가고 있었습니다. 앙상하게 뼈대만 남기고 있는 그의 조각은 말할 수 없는 각성을 주었어요. 현대인의 불안과 고독을 가장 치열하게 파고든 조각가. 그는 지각을 넘어 생명의 본질을 추구하기 위해 모든 살점을 발라내고 있었지요. 그 자리에서 채우는 삶과 덜어내는 삶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채우는 삶이 ‘편안과 기쁨’을 대신한다면 덜어내는 삶이야말로 ‘불편과 슬픔’을 표현하지 않을까요? 전자가 일반적인 삶이라면 후자는 예술가의 삶, 시인의 삶에 다름 아닐 것입니다. 그의 대표작 ‘걸어가는 사람’에서 자코메티는 이렇게 말합니다.
“마침내 나는 일어섰다. 그리고 한 발 내디뎌 걷는다. 어디로 가야하는지 그리고 끝이 어디인지 알 수 없지만 그러나 나는 걷는다. 그렇다. 나는 걸어야만 한다.”
시나 시인이 향하는 길도 그와 같다는 생각입니다. 불편하고 불리하고 불안한 그 시간들은 가장 극명하게 자신과 만나는 삶으로 인도해 갈 것이며 슬픔은 자신을 맑게 지켜줄 것입니다. 미완의 유작이 된 로타르 상 앞에서 죽어간 자코메티의 삶이야말로 ‘불편’과 ‘슬픔’을 감내한 고통이 완성한 빛나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지극한 ‘아름다움’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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