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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인협회문경지부(회장 조향순), 제9회 ‘2016 문경문학아카데미’ 개최
고성환 문경사투리보존회장이자 문경문협 사무국장 초청 강사
문경시민신문 기자 / ctn6333@hanmail.net입력 : 2016년 12월 12일(월) 1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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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경시민신문
한국문인협회문경지부(회장 조향순)는 지난 10일 오전 11시 문경시립중앙도서관 2층 강의실에서 고성환 문경사투리보존회장이자 문경문협 사무국장을 초청 강사로 모시고, 제9회 ‘2016 문경문학아카데미’를 개최하였다.

‘문학으로 감성을 충전하는 날’로 개최되는 ‘2016 문경문학아카데미’는 지난 4월 9일 제1회를 시작으로 이번 12월까지 총 9회 실시됐다.

고성환 문경사투리보존회장이자 문경문협 사무국장의 강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저널리즘과 문학

고성환

1. 들어가며

지금 내 모습은 지나온 삶이 중첩돼 나타나 있다. 외형도 내면도 다 그렇다. 한 겹씩 벗겨보면 다 지난 날의 삶이 쌓여 있는 것을 보게 된다. 그것을 불교에서는 복(福)이요, 업(業)이라고 했다. 그래서 어른들은 40이 되면 자신의 얼굴을 자신이 책임지라고 했는지 모른다.

내 살아온 50년 속에 저널리즘(시사문제를 다루는 모든 인쇄물과 전자 통신장비를 이용한 커뮤니케이션)과 문학도 쌓여 있다. 그 중에 저널리즘은 중학교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 중첩된 삶의 밑바닥에 있다.

솥골에서 중학교를 다니던 우리 집에 그 당시 귀했던 신문을 봤다. 서울신문이었다. 병환으로 방에 계시던 아버지가 소일하시던 도구였다. 아버지는 라디오를 들으시며, 신문을 보시며, 갑자기 들어 닥친 병과 동행하고 계셨다.

라디오에서는 아나운서가 정오뉴스를 멋들어지게 했다. 굵으면서도 높은 톤에 또렷하고, 감칠맛 나는 목소리였다. 나는 이것을 흉내 내기 시작했다. 서울신문을 펴놓고 1면부터 “~했다.”형을 “했습니다.”형으로 바꿔 읽어나갔다. 그런 흉내는 스무 살이 넘도록 이어졌다.

그 후 20대에는 ‘방송대학보’에 글을 투고해 원고료를 몇 번 받는 일이 생겼다. 저널리즘과 문학의 만남이었다. 지금에 끼 맞춰보면 그렇다.

다시 저널리즘을 접하게 된 건 30대 중반이었다. ‘점촌신문’이 발간되면서 ‘기자’를 모집한다고 했다. 지금 의회 앞 어느 건물이었는데, 그곳에서 면접을 봤다. 당장 오라고 했는데, 불확실한 ‘월급’ 때문에 그걸로 끝~

그리고 몇 년 후 마성에서 청년활동을 하면서 ‘낙동신문’을 만났다. 후에 문경신문도 발간됐다. ‘낙동신문’이 문경지역신문으로 적절하지 못했던지 제호를 바꾼다고 공모에 나섰다. 나는 여기에 ‘새재신문’이라고 응모했다. 그리고 신문은 ‘새재신문’으로 바뀌었고, ‘선풍기’를 선물로 받았다. 그리고 그곳에 ‘솔밭축제’광고를 싣고, 기자들을 만나고, 청년회 활동을 실었으며, 문경읍에서 기우회, 다도회, 풍물패를 만든 것들을 실었다.

그 뒤에는 청년회장에 취임하니까 ‘영남일보’에서 인물로 보도했고, 백화문학에 발표한 글 ‘주흘산’을 보고, 경북일보 ‘진용숙’ 기자가 전화해 그 글을 경북일보에 싣겠다고 했다. 그것이 실렸는지는 문경읍에 경북일보가 보급되지 않아 확인 못했다.

그리고 무슨 내용인지 기억은 없지만 ‘조선일보를 읽고’에 기고해 신문에 나왔고, 중앙일보 ‘시조백일장’에 두 번 응모해 뽑혀 실리기도 했다. 서울있는 지인들이 알아보고 전화도 했다.

그러다가 지난 2003년 저널리즘과 운명의 기회를 맞았다. 국회의원 사무실에 근무하게 됐는데, 국회의원에게 있어 언론은 필수불가결한 것이었다. 기자들도 자주 찾았고, 처음으로 보도 자료를 배포하기도 했다. 모두 처음 해 보는 것들이었다.

그때 매일신문 고도현 기자를 만났다. 당시는 군소신문 ‘경북매일’ 기자였다. 고 기자와 재미있게 취재현장을 많이 다녔다. 그러면서 그 세계의 단면들을 편편이 보게 됐다.

그러던 지난 2010년부터 인터넷신문을 창간해보기로 하고 준비를 시작했다. 그리고 1년의 준비 끝에 지난 2011년 매일신문 아류(亞流)로 ‘문경매일신문’을 창간했다. 4월10일경이다.

그날부터 지금까지 ‘주문야신(주간엔 문화원, 야간엔 신문)’의 생활 7년을 맞고 있다. 지금까지 생산한 기사가 1만3천 건에 이른다. 약 2,430일 중 토요일, 일요일, 국경일 등 1년에 100일 정도, 총 680여 일을 제하면 근무일수로 1,750일 정도 되고, 그 근무일수 동안 하루 7.4건 이상 기사를 생산한 것이다.

2. 문경의 저널리즘

문경에서 신문을 만난 건 지난 1987년경 ‘점촌신문’이다. 대판에 주간으로 발행됐는데, 첫 편집국장이 마성 한 해 선배였다. 그 선배나 나나 모두 27~8세였다.

한 2년 후 점촌신문이 폐간되면서 지난 1989년경 ‘낙동신문’이 탄생했다. 그리고 이 신문이 시민들의 공모를 거쳐 ‘새재신문’이 되었고, 지난 2004년까지 10년 이상 장수했다.

그 후 지난 2005년부터는 지역신문 춘추시대가 도래했다. 종이신문에 인터넷신문이 우후준순처럼 이 땅에 태어났다.

지난 2005년 9월 ‘문경신문’이, 10월에 ‘주간문경’이, 11월에 ‘문경시민신문’이 창간돼 10년을 넘기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리고 마침내 이 땅에 인터넷신문이 처음으로 등장했다. 지난 2006년 3월 ‘문경인터넷뉴스’가 그 효시다. 그 후 같은 해 6월 ‘문경뉴스’가 창간했고, 지난 2008년 7월 인터넷방송인 ‘문경조은방송’이, 지난 2010년 2월 ‘인터넷 문경신문’, 같은 해 10월 ‘인터넷 주간문경’, 지난 2011년 4월 ‘인터넷 문경매일신문’, 같은 해 6월 ‘인터넷 문경넷방송’, 지난 2015년 5월 ‘시사문경’과 ‘인터넷 시사문경’, 지난 2013년 4월 ‘인터넷 문경시민신문, 지난 2015년 1월 새재저널, 9월에 문경저널이 창간됐다.

3. 인터넷 문경매일신문 창간과 운영

내가 문경문협 일을 보면서 지난 2014년 말 ‘문경문학’ 정산서를 문경시에 제출하러 갔다. 그런데 담당 공무원의 얼토당토 안한 횡포에 격렬하게 대하면서 소위 ‘갑질’을 했다.

그러고 보면 우리는 누구나 ‘갑질’을 하고 싶어 하는 게 아닌가 생각했다. ‘갑질’. 권력이나, 금력, 심지어 폭력으로라도 누구나 이기고 싶어 하는 것. 그것에 수반한 얼토당토 안한 행동이 ‘갑질’인데, 당시 나는 완전히 ‘을’이었다.

그러나 외부의 시선은 내가 ‘갑’인 것으로 인식되었나 보다. 생각해 보았다. 내가 무엇이 갑이었던가를.... 문화원 사무국장이? 문협 사무국장이? 시장과 성이 같아서? 신문기자라서?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내가 가진 것에 내가 만족하지 못하는 데도, 남들은 선망하고 있다는 것을 내가 그 자리에서 나오고 나서 알게 됐다. 들어가 보면 금방 ‘을’이라는 것을 알 텐데, 그걸 겪어보지 않은 사람들은 알 턱이 없겠다.

문화원 사무국장 10여 년에 나와 다른 곳의 사무국장들이 뼈저리게 느낀 것은 ‘9급 밑에 문화원 사무국장’이라는 사실이었다. 그걸 우째 다 설명할 수 있겠는가? 겪어 봐야 알 것이다.

그걸, 공무원들은 너무 잘 안다. 그런 위치에 있는 내가 너무도 당당하게, 너무도 뻣뻣하게 ‘정산서’를 제출하니, 그 공무원이 심장이 상했던 것 같다.

나의 그런 행태는 타고난 것도 있겠고, 부모님으로부터 학습된 것도 있으리라. 그러면서 내 작은 체구에 대한 콤플렉스를 방어하기 위한 과잉 둘러치기로 세상을 살아오면서 스스로 익힌 생존본능인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 내 태도와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 속에 ‘저널리즘’에 종사하게 된 측면이 있을 것이다. 진짜 ‘갑질’을 하고 싶은 필력! 펜의 힘.

인터넷 문경매일신문을 창간하게 된 동기도 사실은 이런데 있었다. 지난 2009년 6월 당시 나는 문화원 사무국장 재임용 절차 앞에 놓였었다. 그러나 재임용이 여의치 않았다.

그러나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어렵게 재임용을 받았다. 그 과정에서 온갖 루머에 시달렸다. “그래. 좋다. 너희들을 까발려 주마.” 그것이 나의 저널리즘 종사의 동기였다.

그러다가 정말 지난 2011년에는 언제든지 나갈 수 있게 사표를 제출해 놓고, 이 신문을 창간하게 됐다. 최소한의 비용을 투자할 수 있는 두 사람을 만나 ‘가부’를 하기로 했다.

우리 셋은 ‘삼인행필유아사언(三人行必有我師焉)’이라는 공자의 말씀을 서로 인식하기로 했고, 그 글귀를 서예가로부터 받았다.

그러나 신문이라는 것을 창간해놓고 보니, 내 마음먹은 대로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래. 좋다. 너희들을 까발려 주마.”라고 생각했던 호기(呼氣)는 점점 사그라지게 됐다. 세상에 만만한 게 아무 것도 없었다.

이것은 우리 개인이 창간했지만, 우리들 것이 아니었다. 경영문제는 우리들 것이었다 해도, 우리로부터 생산된 정보는 ‘공공(公共)’의 것이었다. 허튼 정보를 생산할 수 없었다.

그리고 ‘주관’이 개입한 평론이 있는 정보에 대해서는 금방 항의가 왔다. 세상엔 한 가지 일어난 사건에 ‘음양’이 있고, ‘정부(正否)’가 있고, ‘앞뒤’가 있고, ‘사정(事情)’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러면서 최근 문경저널 최주영 회장으로부터 ‘직필인주 곡필천주(直筆人朱 曲筆天朱)’라는 말을 듣고, 저널리즘이라고 하는 것에 두려움을 느끼게 됐다.

4. 저널리즘의 역사

최초의 형태로 알려진 저널리즘의 소산은 고대 로마에서 배포된 〈악타 디우르나 Acta Diurna〉라고 하는 낱장짜리 신문이었다.

BC 59년부터 매일 발간된 〈악타 디우르나〉는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번화한 곳에 게시되었으며, 중요한 사회적·정치적 사건들을 보도했다. 중국에서는 당나라 때 〈저보 邸報>라는 관보가 관리들을 대상으로 발행되었다. 이 관보는 지난 1911년에 청조가 끝날 때까지 여러 형태와 다양한 이름으로 거의 연속해서 발행되었다.

지난 1609년 무렵 정기적으로 발간된 최초의 신문이 독일의 도시들과 앤트워프에 등장했다. 최초의 영어 신문인 〈위클리 뉴스 Weekly Newes〉가 지난 1622년에 발간되었으며, 최초의 일간 신문 가운데 하나인 〈데일리 커런트 The Daily Courant〉가 지난 1702년에 발행되었다.

처음에는 정부의 검열과 규제 및 세금으로 인해 방해를 받던 신문은 18세기에 이르러서는 오늘날의 신문이 확보하고 있는 보도의 자유를 누리게 되었고 신문의 독보적인 사회적 기능을 담당하게 되었다.

글을 읽고 쓰는 능력을 지닌 사람들이 늘어나고 증기로 가동되는 인쇄기에 이어 전기로 작동되는 인쇄기가 도입되면서 신문의 일간 발행부수는 몇 천 부에서 몇 십만 부, 마침내는 몇 백만 부로 늘어나게 되었다.

17세기에 학술지로 시작한 잡지는 최근의 시사 사건에 대해 여론을 조성하는 기사들을 특집으로 싣기 시작했는데, 〈태틀러 Tatler〉(1709~11)·스펙테이터 Spectator〉(1711~12)가 이런 특집기사의 보도에 선두적이었다. 지난 1830년대에는 고등교육을 받지 못한 폭넓은 대중을 대상으로 하는 저렴한 잡지들이 대량으로 배포되기 시작했을 뿐 아니라, 삽화를 곁들인 잡지와 여성 잡지들이 등장했다.

대규모의 특집기사를 제작하는 데 드는 비용이 많아지게 되자 특집기사나 국제기사 등을 각각의 개별 신문사와 잡지사에게 파는 전문적인 뉴스 기사 배급처인 통신사들이 생겨나게 되었다. 전신의 발명과 곧 이은 라디오와 텔레비전의 발명은 저널리즘의 업무활동 속도를 매우 빠르게 하고 적시성을 크게 높였으며, 매우 많은 수의 새 지국과 청취자 및 시청자에게 전자 통신장비를 이용해 새로운 정보를 배포할 수 있게 되었다.

20세기 말에는 인공위성을 이용해 저널리즘에 관련된 정보를 원거리에 송신하고 있다. 그리고 지금은 인터넷으로 문자와 영상을 실시간 세상으로 내보낸다. 저널리즘의 혁명이다.

5. 저널리즘과 문학

비록 글을 쓴다는 본질은 같지만 저널리즘과 문학은 일반적으로는 서로 궤를 달리한다. 저널리즘은 사실을 있는 그대로 전달하는 것을 주 목표로 삼는다. 글 쓰는 사람의 의견이나 상상력이 개입할 여지는 적다. 정확한 정보를 정확하게 전달하는 방법을 알아야지 올바른 저널리즘 글쓰기를 수행할 수 있다.

그에 비해 문학은 보이지 않는 것을 표현해내는 것을 주 목표로 삼는다. 저널리즘이 사실에 기반한 이성적 글쓰기라면 문학은 그보다는 감정과 상상의 산물인 셈이다. 결국 두 글은 궤를 달리한다.

정확한 전달력을 목표로 하기 때문에 저널리즘 글쓰기를 평가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필요한 정보를 간결하고 정확하게 전달한다면 그것은 좋은 기사다.

의견이나 추측 등 불필요한 정보가 섞여있거나, 논리의 비약 또는 부재, 비이성적 추론 등이 함유되어 있으면 그것은 나쁜 기사다.

나쁜 저널리즘을 구분하는 것은 비단 논리나 구성방식 뿐만이 아니라 문장력도 한 몫 한다. 불필요한 형용사, 지루한 접속사, 상황에 맞지 않는 단어를 사용하는 문장들은 저널리즘 글쓰기에서 덜 우수하다고 비판받게 된다.

뚜렷한 목적과 보편적인 구성요소를 지니고 있는 덕분에 저널리즘 글쓰기에는 규칙이 존재하고 분석적인 접근 및 평가를 시도할 수 있다. 또한, 바로 그렇기 때문에 저널리즘 글쓰기는 재능보다는 어느 정도의 노력과 훈련을 통해서 발전시킬 수 있는 분야다.

그에 비해 문학은 표현을 주목적으로 삼기 때문에 잘 쓰인 작품과 못 쓰인 작품을 구분하는 기준이 보다 까다롭다. 이는 저널리즘은 객관화된 세계에 대한 타자적 글쓰기를 목적으로 삼지만, 문학은 주관화된 세계에 대한 내적 글쓰기를 수단으로 삼기 때문이라고도 볼 수 있다.

객관화 된 세계에는 보편적 기준이 존재할 수 있지만 주관화된 세계에는 타인의 기준이 침범하기 어렵다. 저자의 의도를 파악하거나 평가하는 것이 까다로워지는 것이다. 이는 보편적인 좋은 문장이나 필수불가결한 형식이 문학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통해서도 다시 한 번 깨달을 수 있다.

6. 나의 꿈 - ‘체르노빌의 목소리’

최근 ‘체르노빌의 목소리’라는 책을 접했다. 큰 충격이었고, 원전폭발에 대해서가 아니라, 내가 기록하고 싶은 분야에 희망이 있다는 것을 발견해서다. 살아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기록하는 일. 비로소 나의 꿈이 되었다.

지난 1986년, 체르노빌 원전 제4호기가 폭발했다. 지난 1945년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떨어진 원자폭탄보다 100배 이상의 방사능이 유출되었다. 하지만 세계는 소련의 핵원자로가 불완전해서, 기술적으로 낙후해서 발생한 일이라고 설명했다. 핵의 신화는 전혀 타격을 입지 않았다. 방사선은 사람을 바로 죽이지 않는다. 충격은 빨리 사라지고 방사능 피폭 2, 3세대의 피해는 관심을 받지 못했다.

지난 2011년, 일본 원전에서 사고가 났다. 저자의 말에 따르면 11기의 원자력 발전소에서 사고가 났다고 말한다. 불완전하지도, 낙후되지도 않았다. 세계 3대 경제국의 '평화적 핵'이 규모 9.0의 강진 앞에 처참히도 무릎을 꿇었다. 전 세계적으로 원자력이 화석연료를 대체할 대안으로 주목받고 있다. 현재 약 30개국에서 443기의 원자력 발전소가 가동 중이다. 그 중 20퍼센트가 후쿠시마처럼 지진 위험 지역에 있다.

이 책은 체르노빌 사고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다. 그 것은 이미 셀 수도 없는 출판물로 인쇄되었다. 『체르노빌의 목소리』는 기록되지 않은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우리가 쉽게 잊어버린 평범한 사람들의 평범한 일상을 기록했다. 체르노빌은 그들에게 집이었다. 사고 난 원전을 정상화시키기 위해 방호복도 입지 않고 일하다 피폭된 남편을 두고, 그 죽어가는 남편을 바라보는 여자에게 의사는 말한다. '눈앞에 있는 사람은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라 방사선 오염 물질'이라고. 저자가 기록 한 것은 과거의 이야기다. 하지만 언제 닥쳐도 이젠 이상하게 생각할 것 없는 우리의 미래이야기이다.

벨라루스 출신 저널리스트 작가로서 최초로 노벨문학상 수상의 영예를 안은 여성작가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67). 언론인 출신 작가가 수상한 적은 많지만 허구가 아닌 온전한 논픽션 물로 노벨문학상을 받았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당시 프랑스에 거주하고 있는 작가는 스웨덴에서 “다림질하다가 전화를 받았다”고 했다.

기자 출신의 알렉시예비치는 체르노빌 원전사고 피해자들,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여성들을 인터뷰해 저널리즘과 문학의 경계에서 독특한 작품 세계를 형성해 왔다. 스웨덴 한림원은 선정 이유에 대해 “작가는 지난 30~40년 간 소련과 소련 붕괴 후 개인들의 모습을 부지런히 그림으로써 사건의 역사가 아닌 감정의 역사를 만들어냈다”며, “그가 한 수 천 건의 인터뷰는 우리가 잘 몰랐던 인간 존재의 역사를 알려주는 동시에 감정의 역사, 영혼의 역사를 보여준다”고 말했다.

알렉시예비치는 지난 1948년 5월 31일 우크라이나 이바노프란콥스크에서 당시 군인이던 벨라루스인 아버지와 우크라이나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군에서 동원 해제된 후 가족들은 아버지의 고향인 벨라루스로 돌아가 정착했고 부부가 함께 교사로 근무했다.

수도 민스크에 있는 벨라루스 국립대 언론학과에 입학한 그는 지난 1972년 졸업 후 브레스트 지방 베레사의 지역신문사 기자와 공립학교 교사로 동시에 근무했다. 이듬해 민스크 지역신문에 취직한 그는 저널리즘에 온전히 종사하기로 결심한다.

지난 1976년 문학잡지 ‘네만’에서 일하며 첫 책 ‘나는 마을에서 떠났다’를 집필했으나 시골 주민의 도시 이주를 금한 소련 정부의 정책을 비판한 내용 때문에 출판되지 못했다. 이후 몇 년 동안 알렉시예비치는 단편, 에세이, 르포 등 다양한 문학 장르에 도전했다.

당시 벨라루스 작가 알레스 아다모비치가 ‘집단소설’이라는 새로운 문학영역을 개척했는데, 이는 알렉시예비치가 허구가 아닌 ‘있는 그대로의 삶을 묘사하는’ 문학에 주력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수년 간 수백 명의 사람들을 인터뷰해 모은 이야기를 논픽션의 형식으로 쓰되, 소설처럼 강렬한 매력을 가진 글로 재탄생시키는 이 방식은 훗날 ‘목소리 소설(Novels of Voices)’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다.

한 인터뷰에서 알렉시예비치는 이렇게 말했다. “저는 실제 삶에 가능한 한 가장 가까이 갈 수 있는 문학적 방법을 찾고 있었습니다. 리얼리티는 언제나 자석처럼 나를 매료시켰고, 나를 고문했고 내게 최면을 걸었습니다. 나는 그것을 종이 위에 포착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실제 인간의 목소리와 고백, 증언 증거와 문서를 사용하는 장르를 사용했습니다. 이것이 내가 세상을 듣고 보는 방식입니다. 개개인의 목소리가 모인 합창, 매일의 세부사항이 만드는 콜라주이지요.”

지난 1983년 탈고한 ‘전쟁은 여자의 얼굴이 아니다’는 작가의 독특한 집필방식이 처음으로 도입된 작품이다. 이 책에서 작가는 2차대전에 전투원, 당원, 공무원으로 참전한 소련 여군들을 인터뷰해 그들의 목소리를 실었다.

그러나 러시아 정부는 참전용사들을 영웅으로 그리지 않았다는 이유로 “대조국전쟁(2차대전의 러시아식 표현)의 영광에 먹칠을 했다”며 책 출판을 금지했다. 작가는 검열에 맞서 치열하게 투쟁했지만 결국 일자리까지 잃고 말았다. 책은 2년 뒤 소련에 페레스트로이카가 도래한 지난 1985년에야 모스크바와 민스크에서 동시 출판됐고, 러시아에서만 200만부 이상 팔리며 독자와 비평가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국내에는 문학동네서 번역 출간했다.

이후 ‘아연 소년들’ ‘죽음에 매료되다’ 등을 통해 전쟁의 광풍에 희생된 어린이, 여성, 남성의 다양한 목소리를 채집해온 작가는 지난 1997년 우크라이나의 체르노빌 핵 참사를 다룬 ‘체르노빌의 목소리’를 집필한다.

10여 년 간 100명 이상의 원전사고 피해자들을 취재해 쓴 이 책을 독일 신문 ‘프랑스푸르느 룬트샤우’는 “애도와 고발로 이뤄진 가공할만한 진혼곡”이라고 평가했다. 이 책을 출판한 뒤 작가와 모국 벨라루스의 사이는 급속히 악화돼 그의 모든 책이 절판되고 학교 교과과정에서도 삭제됐다.

지난 2011년 이 책을 국내 번역한 김은혜 씨는 “웬만한 끈기가 없으면 읽기 어려울 정도로 너무나 참담한 이야기”라며 “그러나 누군가 인류가 살아온 방식을 기록해야 한다고 할 때 꼭 필요한 작품”이라고 말했다.

알렉시예비치는 현재 새 책 ‘영원한 사냥의 훌륭한 사슴’의 마무리 작업을 하고 있다. 사랑 이야기다. 다양한 세대의 남자와 여자가 그들 개인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동안은 사람들이 어떻게 서로 죽이고 죽는지에 대한 책을 써온 것 같아요. 하지만 그게 인간 삶의 전부는 아닙니다. 이제 저는 사람들이 어떻게 서로 사랑하는지 쓰고 있어요. 사랑은 우리를 세상으로 데려갑니다. 나는 사람들을 사랑하고 싶어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지만요.”
문경시민신문 기자  ctn6333@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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