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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경시민신문, ‘제6회 2016 신춘문예 당선작’ 발표
응모는 적었으나 소설 외 부문별 질 높은 당선작 나와
문경시민신문 기자 / ctn6333@hanmail.net입력 : 2016년 05월 30일(월) 00:13
공유 : 트위터페이스북미투데이요즘에
지난해를 제외하고 꾸준히 신춘문예 행사를 개최, 참신한 문학 신인을 발굴해온 문경시민신문(발행인 김정태)은 3일 ‘제6회 2016 신춘문예 당선작’을 발표했다. 희곡 부문은 응모자가 없었고, 여타 부문에서는 응모하는 작가들은 적었으나 응모한 부문들 중에 소설을 제외하고는 각 장르마다 질 높은 당선작이 나왔다.

시와 시조 부문의 심사위원은 한국펜클럽본부 경북지회장이신 김시종 원로 시인이 맡으셨고, 수필과 소설 부문의 심사위원은 한국문인협회 문예대학 수필지도 교수이신 서경희 작가가 노고를 해주셨다.

장르별 당선은 다음과 같으며 시상식은 오는 6일 오전 10시(우천불구) 영신 숲 전국백산여성백일장 현장에서 가진다. 이날 당선 작가에게는 당선 상장과 고가의 영남요 도예작품(중요무형문화재 105호 사기장 백산 김정옥<白山 金正玉) 명장 작품)을, 준당선 및 가작 작가에게는 상장과 황담요 김억주, 려금요 이규성, 상주 옹기장 벽토 정대용 도예가들의 작품을 부상으로 드린다.

▲ 시 당선(작품명 : 도연제 / 망향의 봄 2편)
작가이름 : 하심(대구시)
심사소감 : 5편의 응모작 모두 고르게 높은 수준을 보였다. 지난 시절 추구와 원초적 정서 및 정확한 시어 구사, 나아가 오랜 수업이 보인다.

▲ 시 준당선(작품명 : 5월의 그리움 1편)
작가이름 : 문이희(대구시)
심사소감 : 3편의 응모작 중 ‘5월의 그리움’은 섬세한 여심정서가 돋보이고, 시 내용이 깨끗하다.

▲ 시조 당선(작품명 : 소품 / 들녘에서 2편)
작가이름 : 김종호(문경시)
심사소감 : 3편의 응모작 모두가 기지가 넘치며 단수(短首)의 시어를 구사하고 있다.

▲ 수필 당선(작품명 : 봄을 맞다 1편)
작가이름 : 조여경(대구시)
심사소감 : 수필 소재는 멀리 있지 않고, 가까운 주변에 있다. 글을 끌어가는 솜씨도 참하고, 앞날의 대성(大成)이 기대된다.

▲ 소설 준당선(작품명 : 남해 속 금산 1편)
작가이름 : 권혁찬(문경시)
심사소감 : 특이한 소재가 돋보인다.

▲ 소설 가작(작품명 : 드문 일입니다 1편)
작가이름 : 손해붕(문경시)
심사소감 : 꾸준한 노력이 돋보이며 지속된 노력은 작품성을 높일 것이다.

▲ 시와 시조 부문 심사소감<심사위원 : 한국펜클럽본부 경북지회장 김시종 시인>

바쁜 일상 속에서도 문심(文心)을 곱게 가꾸시는 응모자 제현이 참 믿음직하기만 하다. 날로 문장력이 발전하여 대성(大成)하시기를 빈다. 먼저 시 당선자로 뽑힌 하심 시인은 응모작 5편 모두가 수준이 고른 수작(秀作)들이다. 흘러간 지난 세월을 놓치지 않고 지난 시절을 진지하게 추구하며, 원초적 정서를 튼실하게 살려놓았다. 정확한 시어 구사를 보니 오랜 시작 수업이 엿보인다. 당선작을 두 편이나 뽑았다. 시인으로 대성이 기대된다. 시 준당선자로 뽑힌 문이희 시인의 시 ‘5월의 그리움’을 준당선작으로 고른다. 섬세한 여심을 나타낸 시 내용이 깨끗하다. 정진을 빈다.

시조 당선 김종호 시인은 ‘소품(小品)’ ‘들녘에서’를 당선작으로 골랐다. 두 편 모두 깔끔한 단수(短首)다. 특히 단시(短詩)일수록 위트(wit)가 필수 자산으로 단시조가 현대시조의 활로라고 확신한다. 계속 정진하시기 바란다.

▲ 수필과 소설 부문 심사소감<심사위원 한국문인협회문예대학 수필지도교수 서경희 작가>

수필 당선작 ‘봄을 맞다’<조여경>은 대구 시내 중고교 국어교사로 시와 수필을 지도하고 있다. 수필감(재료)은 멀리 있지 않고 우리들 주변에 있다. 글을 이끌어가는 솜씨도 참하다. 앞날의 대성(大成)이 기대된다. 소설 준당선 권혁찬 님의 ‘남해 속 금산’은 소재가 특이하다. 역사소설인데, 소재를 구하기는 시사소설보다 쉬운 점도 있지만, 새로운 의미를 확립해야 하는 어려움도 있다. 정진만이 살길이다. 소설 가작 ‘드문 일입니다’<손해붕>은 글을 이끌어가는 뚝심이 대단하다. 단편소설이 장편소설보다 오히려 어렵다. 문학가의 제일 미덕은 꾸준한 정진이다. 건필을 빈다.

↑↑ 하심 약력

1959년 경북 안동 출생
추월문학회 회장,
두레박 시 동인,
경북예총운영위원, 달구벌축제운영위원 역임,
미스 대구 심사위원 역임,
TBC 방송 편성제작본부장, 국장
현, 편성기획팀 국장
ⓒ 문경시민신문
▲ 시 당선작과 소감

도연제 (陶淵祭)

하심

시월 초닷새 구름마저 퉁퉁 부은 날
북어포 한 마리와 소주 한 병을 들고
지례 가는 아홉 구비길에 오른다
바람이 정강이 속을 후비듯 싸아하게 분다
이 세상에 없는 사람들의 가슴 만나러 가는 길이다

가랫재 산등성이 넘어서면 펼쳐지는 낯선 풍경
임하호 푸른 물에
동그랗게 뜬 세 봉우리,
물결에 파랑이 이는 심연의 호수,
저 아래가 바로 도연(陶淵)이다

저기에서 천만년을 물보라 일으키며 떨어졌을
폭포를 기억해 본다
비류직하 삼천척은 아니더라도
늘 우레 같은 울음을 울던 그 물의 포효를

햇살 푸르른 날은 마당 가득히
고추와 깻단이 있었지
구부린 허리로 콩타작 하는 삭정이 같은 농부들,
가끔은 갓끈 늘어뜨린 종조부께서
뒷짐지고 골목길을 돌아 나오고 계셨지
꽁보리밥 반 사발과
김치 한 보시기로 허기를 달래고도
햇살이 돋보기로 모이는 섬돌에
희로애락을 견뎠던 신발들

호수에 물이 차면서
마을마저 물에 잠기던 날
차마 제 살던 초옥과 앞마당 터 바로 보지 못하고
애써 고개를 돌려
도연폭포가 물속으로 들어가던 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던, 주름진 눈가에 맺히던 이슬
그 처연한 얼굴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해마다 시월이면
물속에 잠긴 채 잠자는 무수한 기억들을 위해
북어포 한 마리와 한 잔의 술을 놓고
푸른 도연에서 목 놓아 운다

유세차 시월 삭 초오일 불초 현손 ... 감소고우

망향의 봄

하심

진달래
어김없이 꽃망울 터뜨리는
붉은 계절이 오면
천만가지 사념의 끝에
고이 접어 둔 기억들, 엽서처럼 넘긴다

익숙한 풍경 하나



민둥산
나른한 언덕 넘어
산꿩조차 긴 울음 토하는 물푸레나무 숲
조붓한 오솔길 너머 아득한 길
그리고 울긋불긋 지천으로 번진 산벚나무

모두가 절정을 견딘다

나른하게 쏟아지는 햇살이
꽁꽁 싸매었던 기억의 빗장을 푸는
사월의 오후엔

이랴!
워워!
쟁기 맨 소와 나누는 끝없는 대화
내 아버지의 가난한 봄이 거기 있었다.

<당선소감-하심>

세 가지의 기쁨

내 나이 여섯 살이 되자 어머니께서는 내게 처음으로 가나다라를 가르쳐주셨다. 온갖 세상일에 호기심이 많던 때였지만 나는 어머니께서 미리 써 주신 체본에 따라 글씨를 따라 쓰는 일이 지루하게 느껴지지 않았고 그러다 보니 금세 한글을 깨우쳤다. 가끔씩 어머니를 따라 읍내에 나가면 거리의 간판 읽는 재미에 빠져 뒤처지기 일쑤였다. 글 읽는 것을 대견스러워 하셨던 어머니께서는 어느 날 내게 H신문사에서 나온 철 지난 소년신문 한부를 구해주셨다. 그날 이후 나는 꼼짝도 않고 그 신문을 거의 외다시피 읽었던 기억이 지금도 새롭다. 글 읽는 게 기쁨이었다.

세월이 흘렀다. 그동안 내 삶은 사는 일에 쫓겨 뒤조차 돌아 볼 겨를조차 없을 만큼 바쁜 생활의 연속이었다. 그러던 중 우연한 기회에 시를 읽어주는 낭송 관련 일과 인연을 맺게 되었다. 한 편의 시를 고르기 위해 매일 수십 편의 작품을 읽는 가운데서도 마음에 와 닿는 시나 시조 한두 편을 발견하는 즐거움도 꽤나 쏠쏠한 즐거움이었다. 두 번째 기쁨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무모한 도전을 시작했다. 시를 읽는 것이 아니라 내가 시를 써 보리라 맘먹은 것이다. 시작(詩作)이란 중고등학교 때 군내 백일장이나 교내 문화제에 어쭙잖은 솜씨로 두어 번 상 받은 기억 밖에 없는 천둥벌거숭이가 시를 쓴다는 것은 만용에 가까웠다. 시와 관련된 이론서에서도, 유명 작가의 문학 강연에서도 시를 잘 쓰는 방법을 가르쳐주지는 않았다. 아침이면 어제 쓴 시를 PC창에 띄워놓고 퇴고를 거듭하다 종내 지우기를 반복하는 그런 지난한 과정만이 반복되었다. 그러던 중 날아 온 문경시민신문 신춘문예 당선이라는 영광은 내게 시를 쓰는 즐거움을 발견하게 해 준 엄청난 일이었다. 이제 세 번째 기쁨까지 누리게 된 것이다.

요즘 매일 아침이면 나는 도회의 변방 야산에 마련한 주말 농장에 간다. 밤새 시든 호박과 오이, 상추를 위해 근처의 우물에 들러 물을 한 양동이 길어 올린다. 웬만한 가뭄에도 쉽사리 마르지 않는 저 우물에서 길어 올린 맑은 물처럼 내 시심도 저리 깊어 사람의 마음을 촉촉이 적시는 한두 편의 시라도 건져 올렸으면 하는 간절한 맘이 든다. 목마른 대지를 적시는 한줄기 소낙비 같은 해갈과 치유의 시를 쓰고 싶다. 늘 부족하다고 자책해 온 내게 분에 넘치는 영광을 주신 문경시민신문과 심사위원님들께 고개 숙여 감사를 드린다.

↑↑ 김종호 약력

1954년 문경 농암 출생
2005년 ‘문학의 창’ 시 부문 신인상
2013년 ‘나래시조’ 시조 부문 신인상
한국문인협회 회원, 국제PEN클럽 회원, 나래시조 회원, 문협문경지부 회원
ⓒ 문경시민신문
▲ 시조 당선작과 소감

소품小品

김종호

소(牛)품을
떠나오신
멍에와 코뚜레가

소머리
국밥집에
소품으로 벽에 걸려

국밥이
나올 때 마다
자동 묵념 올리시네.


들녘에서

김종호

저기 저 농부님은
굽은 논둑 걷다보니

어느 사이 등도 굽어
바람조차 휘며가네

꽃바람
몇 번 불었나
아득하다 그 세월.

<당선소감-김종호〉

오월 한낮 하얀 나비 장다리꽃 찾아들어
살포시 내려앉듯 당선 소식 날아왔어요.
시의 꽃 잘 피워보라 당부하신 말씀이리요.
문경시민신문과 뽑아주신 심사위원님과
이 신문을 읽으시는 모든 분들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 문이희 약력

1956년 대구 출생
계명대학교 가정대학 식품영양학과 졸업
제28회 백산전국여성백일장(2012년) 시 부문 우수
제4회 ‘2013 제4회 문경시민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 준당선
제5회 ‘2014 제5회 문경시민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 당선
ⓒ 문경시민신문
▲ 시 준당선작과 당선소감

5월의 그리움

문이희

텃밭 보랏빛 등나무꽃 벌을 부르고
농막 위 상사화 푸르른 잎을 뽐내며
따가운 햇살 아래 꽃잔디 예쁜 미소로
가는 봄날을 아쉬워해요

바람에 실려 오는 새들의 지저귐
아! 꽃향기 가득한 5월의 첫날에
보고픈 얼굴, 꽃잎 돼 찻잔에 떨어져요

듣고픈 목소리 두 고막을 울리며
다정히 나를 찾아 부르고 있는데,
메아리로 남은 목소리 폐부를 파고들어
자꾸만 살펴봐도 바람만 스쳐지나요.

<당선소감-문이희>

문경 진남의 텃밭에서 생활한 지가 반 십년이 지났다. 산과 물과 길이 한데 어우러져 태극을 만드는 곳, 삼태극의 고장 진남에서의 생활 자체가 시적 삶이었다. 나도 모르게 시심이 떠오르면 메모한 것들이 당선의 영광을 차지할 줄이야. 너무 과분한 상을 받는 것 같다. 그간 제일 사랑하는 어머님이 하늘나라로 가셨다. 5월 가정의 달, 특히 어버이날에 카네이션을 가슴에 단 이 세상의 어버이들을 보노라면 그리움에 사무쳐 눈물을 글썽이곤 한다. 바람만 스쳐 지나도, 꽃잎이 떨어져도, 오월의 장미가 붉은 빛을 더해도 너무나 그립다. 살아생전 잘해주지 못한 일들만 떠오른다. 나도 두 아들의 어머니이지만, 항상 자식들 걱정이다. 나의 어머니도 항상 “밥 잘 먹었느냐, 아픈 데는 없느냐?”고 전화를 하곤 했었다. 이제는 전화 대신 새 소리로, 바람으로, 꽃잎으로, 봄비로 말해준다. 이런 이미지가 ‘5월의 그리움’이란 시를 만들게 했다. 이 영광을 먼 데 계신 사랑하는 어머님께 돌린다.

↑↑ 조여경 약력

1990년 대구 출생
영남대학교 사범대학 국어교육과 졸업
강원문학 신인상 시조부문 당선
백산 여성백일장 우수상
우수 교육실습생 우수상
가스안전 공모전 대상
독도 사랑 전국 공모전 최우수상
전국 한글 백일장 장원
보훈 문예 공모전 최우수상 수상
ⓒ 문경시민신문
▲ 수필 당선작과 당선소감

봄을 맞다

조여경

3월의 창문을 연다. 바람은 아직 차갑지만 너그러워진 햇살이 나뭇가지 위, 덜 녹은 얼음에 부딪혀 반짝인다. 곱게 입술을 여는 꽃망울들은 금방이라도 꽃을 피워낼 것처럼 한껏 으스대며 어깨를 편다.

“딩동!” 메시지가 도착했다는 알림음이 울린다. 평일 4시 30분 이후에 오는 연락은 대부분 작년에 가르쳤던 학생들에게서 오는 것이다. 등교 시간에 휴대 전화를 제출하고 방과 후에 받기 때문이다.

‘선생님 보고 싶어요, 잘 지내시죠, 언제 한 번 찾아 갈게요’ 등 도착하는 메시지의 내용은 늘 비슷하지만 받을 때마다 기쁘고 고마운 기분이 든다. 새 학기가 시작된 3월 초부터 연락을 해오는 학생이 있는가 하면, 늦게 연락 드려서 죄송하다며 하지 않아도 될 사과와 함께 조심스럽게 연락하는 학생도 있다.

작년에 나는 특성화 고등학교 학생들에게 국어를 가르쳤다. 특성화 고등학교라고 하면 실업계랑 다른 게 뭐냐며 편견을 가지는 사람이 많다. 나 또한 처음에는 내가 고등학생일 때 없었던 제도라 생소하기도 하고, 안 그래도 낮아진 교권이 더 떨어진 분위기인 건 아닐지 덜컥 겁이 나기도 했었다. 하지만 알고 보면 뚜렷한 목표의식을 가지고 자신의 적성을 살려 꿈을 이루기 위해 진학하는 똑똑한 아이들이다. 정이 많은 학생들은 처음 보는 선생님에게 먼저 인사와 말을 건네기도 하고, 자신이 직접 만든 빵이나 과자를 주기도 했다.

3월 2일, 쌀쌀한 날씨와 낯설음에 온몸을 꽁꽁 싸매고 얼어있던 나는 아이들이 먼저 내미는 손과 함께 새 학기 특유의 서먹함이 녹아내리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첫 수업시간, 나를 당황시킨 남학생으로 인해 내게는 다시 겨울이 찾아올 뻔했다. 선생님이 들어왔는데도 엎드려 자는데 반 아이들 아무도 그 학생을 깨우지 못했다. 억지로 깨워 자기소개를 해보자고 하자 대놓고 짜증을 냈고, 그런 일은 그 반뿐 아니라 여러 반에서 3월 수업 내내 빈번하게 일어났다. 어느 학급에나 그런 식으로 한두 명씩 학급의 분위기를 주도하는 학생이 있는 것이다. 수업을 시작해도 잠을 자고, 깨우면 옆의 친구와 떠들거나 수업을 열심히 듣고 있는 친구들을 괴롭히며 수업 흐름을 방해하는 경우가 많았다. 당황스러운 마음에 조심스럽게 다른 선생님들께 말씀드렸더니 심지어는 자신을 혼내는 연세 많으신 선생님을 학생들이 보는 앞에서 조롱하고 욕하며 학습 분위기를 흐리기 일쑤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리고 많은 선생님들에게서 포기 아닌 포기를 하는 학생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어떤 선생님들은 강하게 나가는 방법을, 어떤 선생님들은 내버려 두는 방식을 선택하신다고 했는데 담임을 맡은 것도 아니고 경력이 많지 않아 노련미도 없는 나는 오랜 고민 끝에 조금 다른 방식으로 학생들을 대하기로 했다. 교사와 제자가 아닌, 인간 대 인간으로 다가가 신뢰감을 형성하되 영화나 드라마에서나 볼법한 무한신뢰를 주는 선생님이 아니라 따끔한 충고도 하고 마음 놓고 상담도 할 수 있는 선배 같은 선생님이 되기로 했다. 진도 조절을 해서 한 달에 두세 번은 자신이 쓰고 싶은 글을 쓰게 하여 ‘참 잘했어요’도장을 찍어주며 일일이 감상평을 적어주었다. 처음에는 글쓰기를 두려워하고 싫어하던 학생들이 글을 통해 나와 소통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귀를 닫고 말을 듣지 않던 학생들이 글로써 자신을 드러내고, 나는 글로써 학생들을 이해할 수 있었다. 일명 ‘문제아’로 찍혀 모든 선생님들이 기피하는 학생들이 내가 담임이 아닌데도 개인적으로 상담을 요청하거나 내 수업 시간에 나서서 학습 분위기를 만드는 등 반 분위기를 주도하던 아이들이 마음을 잡으니 전체적으로 수업 참여율과 집중도가 높아졌다.

학창 시절, 선생님들께서 가끔 졸업한 선배들의 이야기를 해 주시며 말썽부리던 애들이 기억에 많이 남고, 그 애들이 졸업 후 다른 애들보다 연락도 잘하고 잘 찾아온다고 하신 말씀이 기억났다. 학기 초에 너무 말을 듣지 않아 내 가슴을 답답하게 만들었던 학생이 취업했다고 장문의 편지와 함께 선물을 보낼 때, 글쓰기 시간에 친구와 떠드느라 바쁘던 학생이 새벽에 자기가 쓴 시라며 메시지를 보낼 때, 그리고 ‘선생님, 저 같은 학생 보는 낙에 사셨잖아요~’라며 너스레를 떨 때, 나는 그때는 이해하지 못했던 선생님들의 그 말씀에 고개를 끄덕인다.
교사라는 직업은 참 신기하다. 학생들의 나이는 늘 그대로인데 나는 나이를 먹고 있다. 매년 봄, 학생들의 마음에 작은 씨앗을 뿌려 꼭꼭 다지고 정성을 다해 싹을 틔우면 나의 땀을 먹고 자라 알알이 여문 열매들을 가을에 내보내고, 봄이 오면 다시 밭에 씨앗을 뿌리는 농사꾼의 심정과도 같다. 마음과는 다르게 조금 삐뚤게 자라는 나무도 있지만,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이 어디 있으랴. 대지의 모든 것에 똑같은 햇살을 내려주는 태양처럼, 시원한 물을 내려주는 비처럼, 마음 밭에 심은 씨앗에 다정한 관심을 주다 보면 조금 비뚤게 자란 나무도 꽃을 피운다. 한 아이가 자라려면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속담처럼 비록 한 해 스쳐지나가는 인연일지라도 한 인간의 일부에 내가 도움이 되기 위해 노력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작년 3월, 내게 먼저 내밀어준 아이들의 따뜻한 손을 떠올리며 휴대 전화를 들어 답장을 한다. 봄 햇살이 가슴 가득 내려앉는다.

<당선소감-조여경>

한낮의 거센 기운이 붉은 장미가 되어 서쪽하늘에 피어오를 무렵, 한 마리 까치소리처럼 반가운 당선 소식이 날아들었다. 벌써부터 여름의 문턱에서 허덕이다가 들려온 단비 같은 소식에 목마름이 해갈되는 기분이었다. 이 기쁜 오아시스는 내 마음 깊은 곳에 자리 잡아 한여름 가뭄에도 결코 마르지 않는 내 삶의 옹달샘이 되어줄 것 같다.

8살 때부터 지금까지 줄곧 일기를 써왔다. 초등학생 때는 쓴 일기를 매일 담임 선생님께 검사 받아야 했지만 중학교 1학년부터는 순전히 내 의지였다. 지금도 보물 1호는 그동안 쓴 일기장들이 담긴 상자다. 긴긴 밤 허리를 잘라 이불 아래 넣었다가 임 오신 날 펴겠다는 황진이의 시조처럼 덧없이 흘러가는 시간을 잘라내어 보석 같은 시간에 덧대고 싶었지만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기에 대신 기록하는 법을 선택했다. 나이가 들고 바쁘게 달리다보니 지나온 세월 안에서 잊고 살아온 것들이 많은데, 해마다 잃어버리고 있는 ‘분실물’들을 내가 쓴 일기를 꺼내 읽으면서 되찾고 있다. 이렇게 수필이라는 것은 내가 겪고 느낀 시간을 잘라내어 글로써 박제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학생들에게 자신의 생각과 경험을 길든 짧든 한 편의 글로 나타내게 하여 감상평과 함께 ‘참 잘했어요’ 도장을 찍어주었었는데 이번에는 내가 그 도장을 받은 것 같다.

달려온 길보다 달려 나갈 길이 더 많은 나에게 이토록 충만한 앞길을 닦아주신 문경시민신문과 심사위원님들께 감사의 큰절을 올린다.

↑↑ 권혁찬 약력

1986 대구광역시 출생
안동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2015년 1월~ 문경시청 근무(현)
ⓒ 문경시민신문
▲ 소설 준당선작과 당선소감

남해 속 금산

권혁찬



남해 금산

이성복

한 여자 돌 속에 묻혀 있었네
그 여자 사랑에 나도 돌 속에 들어갔네
어느 여름 비 많이 오고
그 여자 울면서 돌 속에서 떠나갔네
떠나가는 그 여자 해와 달이 끌어 주었네
남해 금산 푸른 하늘가에 나 혼자 있네
남해 금산 푸른 바닷물 속에 나 혼자 잠기네

1.
서기 675년, 한반도. 전야산군(轉也山郡)(현 남해지역) 나당전쟁이 한창이던 늦은 오후, 웬 하늘하늘거리는 몸체의 고승과 그를 따르는 여러 중들이 줄을 지어 가파른 산을 오르고 있다. 가장 앞서 길을 떠나는 고승의 몸엔 빨간색 천과 회색의 천이 한데 어우러져 흡사 누더기 같이 보였다. 짚신은 없어진 지 오래되어 보이며, 이들의 모습은 흡사 사나흘은 굶은 산적의 모습으로 보아도 무방하다. 하지만 딱 하나, 그들의 눈과 풍채는 흔들리지 않았으며, 고승을 따라 일사분란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앞서 가던 고승이 멈춘 곳은 남해의 끝자락 남해금산의 정상이었다.

“이곳도 그들을 채울 수는 없다…….”

나지막하게 들리는 고승의 중얼거림에 그를 따르던 중들 중 한 명이 고승의 곁으로 다가섰다.

“이제 곧 대지의 끝입니다, 대사님.”

“그렇다고 부처의 중생과의 약속을 저버릴 수는 없다. 어서 길을 재촉하자.”

“네, 대사님.”

시간을 지체하는 것이 아깝다는 듯 나지막하게 들리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고승은 다시 발길을 돌렸고, 중들도 바쁘게 그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뒤를 따르는 제자들에게 있어 스승의 말은 언제나 법과 같았지만, 그 어떤 이유도 모른 채 이렇게 서라벌에서 전야산군까지 고행 길을 함께 하는 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그런 일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그 고승이 바로 원효였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맨몸으로 서라벌에서 출발하여 거치는 어느 곳마다 스승님의 품에서 꺼내는 필지와 마패를 통해 잠자리와 먹을 것을 제공 받아 왔다는 것과 스승님이 언제나 정연이라 쓰인 돌 항아리와 함께 하였다는 것을 의문으로 여겨 왔다.

그리고 닷새 후.
원효 대사의 무리들은 대지의 끝자락에서 마지막 산을 오르기 시작한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들의 눈앞에 나타난 산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지도에는 나타나 있지 세상의 어느 지도에도 기록되지 않은 산이었다. 곧장 원효 대사는 산을 오르기 시작했고, 제자들도 그를 따르기 시작했다. 제자들이 뒤늦게 스승의 발자취를 따라 정상에 다다랐을 때, 제자들은 스승의 눈물을 분명하게 보았다. 그리고 원효 대사는 이렇게 말했다.
“금산 38경을 이루는 천태만상의 기암과 울창한 숲, 그리고 눈 아래로 보이는 바다와의 절묘한 조화는 명산으로서 손색이 없다. 왕의 눈물과 그의 육신이 영원히 꿈 꿀 수 있는 극락장생의 세상이 여기가 아니면 어디란 말인가…….”
그의 제자들은 무슨 까닭인지도 모르는 채 처음 보는 스승의 눈물에 고개를 들지 못하고 스승과 그의 돌 항아리 주변에서 말없이 땅만 바라보았다.

2.
전야산군의 어느 사찰.
모든 제자들을 한데 모은 원효대사는 이 산에 자신이 지니고 다녔던 돌 항아리를 보관할 사찰을 지을 것과 이곳을 찾아올 나약한 중생을 예언했다. 그리고 그날 새벽, 원효 대사의 방에는 원효 대사는 온데간데없고 문무왕의 직인이 찍힌 필지와 마패만이 남아 있었다. 그리고 서라벌을 떠나오던 날처럼 역시 제자들에게 아무런 말도, 해답도 주지 않은 채 또다시 고행 길을 떠났다. 원효대사가 오랜 고행 끝에 선택한 보광산은 영남에서는 합천의 가야산, 방장산(지리산)과 자웅을 겨루고 중국의 남악(南嶽)에 비견되기도 했으며, 바다 속의 신비한 명산이라 하여 ‘소금강산’ 이라고 저잣거리에서 불리던 곳이었다. 제자들은 이런 곳에 돌 항아리를 모셔놓을 사찰을 짓는 것과 머지않아 찾아올 나약한 중생을 기다리라는 것을 무슨 의미로 받아 들여야 할까 의구심도 잠시... 언제나처럼 스승의 말을 하늘의 뜻으로 받들고 제자들은 하나 둘씩 산으로 오르기 시작했다.

그 시각, 남해의 가장 북쪽 설천에서는 보광산에서 내려온 원효 대사가 그의 제자 중 가장 입이 무거운 제자 석천을 데리고 서라벌로 향하고 있었다. 석천은 아침 새벽부터 지금까지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정신없이 스승만을 따라가고 있었다. 한참을 걸은 후 그들이 도착한 곳은 안개가 자욱한 새벽바다였다. 그들이 도착했을 때는 이미 사공이 배 한 척을 바다에 띄울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배에 오른 후 한참 동안 말이 없던 원효 대사가 석천을 불렀다.
“석천아.”
적막만이 맴돌던 바다 한 가운데에서 원효 대사의 목소리가 낮게 울려 퍼졌다. 배에 오르는 순간 긴장이 풀림과 동시에 깜빡 잠이 든 석천이 갑작스레 들려오는 스승의 목소리에 놀라 잠에서 깨 다급하게 대답했다.
“예, 스승님. 부르셨습니까?”
그런 석천을 아는지 모르는지 원효 대사는 허공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입을 열었다.
“너는 나에게 궁금한 것이 없느냐?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나의 행동에 대해 묻지를 않는구나.”
“어찌 스승님의 행동에 의문을 품겠습니까. 그저 따라가는 것이 배움이라 믿습니다.”
“고맙구나. 하지만 하나는 말해 줄 수 있겠구나. 너와 우리들이 하는 일들은 분명 부처의 덕을 행하는 것이다. 그것만은 네가 알아줬으면 좋겠구나.”
“예…….”
“죽음이란 한 조각 뜬구름이 쓰러지는 것이오, 삶이란 한 조각 뜬구름이 일어나는 것이구나.”
말없이 구름만 바라보는 스승을 석천은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그리고 언제나처럼 둘 사이에는 하염없는 적막이 있었다.

3.
서라벌의 새벽
서라벌 도성 서쪽 성문에서는 말을 탄 여러 무리들이 바쁘게 성문을 빠져 나가고 있었다. 특히 무리 중 중심의 말이 단연 돋보였다. 그 말은 하루에 천리를 가고, 온 몸의 털이 붉으며 머리에서 꼬리까지 길이가 1장이고 키가 8척에 이르렀다는 여포, 관우의 적토마와 흡사했다. 또한 검은색 옷을 입은 중심인물 이외에 모든 이가 1등급에서 5등급까지의 관료들이 입을 수 있다는 자색의 옷을 입고 있다는 것과, 신라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띠고리와 말띠꾸미개, 말띠드리개 등의 여러 치장들, 검은색 옷의 인물이 차고 있던 세고리 장식의 장검과 그 무리들이 차고 있던 봉황장식의 장검은 그들의 신분을 무엇이라 확실하게 단정 짓기 어렵게 하였다. 하지만 누구라도 가벼이 볼 수 없는 위엄과 절도는 차갑고 무거운 새벽 공기를 보다 더 무겁게 하였다. 그들이 수 분 내에 도착한 곳은 분황사의 모전탑이었다. 무리가 도착하자 사찰의 지운 지주 스님과 그곳의 사람들이 기다렸다는 듯 그들을 맞이하였다. 세고리 장식의 장검을 찬 사내가 말에서 내리자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엎드려 그를 맞이하였고 지운 스님만이 영접하고 모전탑 안으로 그를 안내하였다. 모전탑 안의 불빛이 새벽의 어둠을 밝히자 서서히 그의 얼굴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지운 스님은 그의 첫 인상을 이렇게 묘사했다.
“그의 자표가 특이하여 넓은 이마와 높은 콧마루에 네모난 입과 겹턱을 가졌는데, 용안은 불그레하고 체상은 풍만하고도 장대하였다. 그리하여 바라보면 엄연한 위엄이 있어 두려움을 느끼게 하였는데, 앞으로 나아가면 온화하게 덕이 있어 친근함을 느끼게 하였다. 그는 바로 신라 제30대 문무왕이다.”
지운 스님은 문무왕을 보필하여 이곳까지 온 사내들 또한 반갑게 맞이하였다. 먼저 친동생 김인문(金仁問) 장군과 김유신(金庾信) 장군, 대신관료 김삼(金三光), 열기(裂起) 장군, 김유신 장군의 동생인 김흠순(金欽純) 장군이 차례로 모습을 보였다. 이들은 모두 신라의 삼국통일에 있어 중추적인 역할을 한 인물들로 문무왕의 절대적 신임 속에 그의 비밀 호위를 맡아 여기까지 함께 하였다. 인사가 끝나기가 무섭게 문무왕은 지운 스님에게 원효 대사의 안위와 현 위치를 물었다. 그만큼 문무왕의 얼굴에는 불안함과 동시에 촉박함이 묻어나왔다.

“오늘 새벽에 당도할 것이라는 전갈을 받았오. 아직인것이오?”
“예, 전하. 저희도 새벽에 올 것이라는 소를 받았을 뿐 현재까지 기다리고만 있습니다.”
“한시가 급합니다. 자눌이 원효 대사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습니다. 어서 사람을 보내 안위를 챙기라 이르세요.”
“전하. 이미 사람을 남쪽 성문으로 보내놓았습니다. 곧 전갈이 올 것입니다. 모든 일은 계획 한 대로 잘 진행되고 있으니 염려 마시고 안정을 되찾으십시오.”
지운의 말에 그제서야 한 시름 놓은 문무왕이 크게 한숨을 쉬며 지운이 안내해준 의자에 몸을 앉혔다.
“……. 네, 자시(子時)까지만 기다려 봅시다.”
안심하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하지만 문무왕은 타오르고 있는 양초의 촛농만큼이나 시간 또한 거꾸로 흐르고 있는 것만 같은 생각이 자꾸 들었다.

같은 시각 원효 대사와 석천이 서라벌 남쪽 성문에 도착했을 때 그곳은 너무나 춥고 외로워 보였다. 사람들은 집 밖으로 나오려 하지 않았고 무장한 병사들만이 거칠 것 없이 서라벌을 휘젓고 있었다. 날이 밝아 올 시간이 다가올 만큼 병사들의 수는 서라벌 전체를 더욱더 어둡게 만들어 갔다. 이에 원효 대사와 석천은 서라벌 시내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었다. 성문 뒤쪽에 몸을 숨기고 있던 그들에게 누군가가 소리 없이 다가왔다. 그리고는 원효대사의 팔을 낚아챘다. 이에 놀란 원효대사가 소리를 질렀다.
“누, 누구냐?”
“쉿. 지운 스님이 보낸 사람입니다. 저희를 따라 오십시오.”
검은 자객이 얼굴을 둘러싼 검은 천을 내리며 자신의 신분을 밝혔다. 하지만 원효 대사는 미덥지 않은 표정으로 그를 이리저리 훑으며 말했다.
“당신이 지운이 보낸 자라고 내가 어찌 믿을 수 있느냐.”
“이를 보여주라 하셨습니다. 사리입니다.”
자객은 품속에서 흰 천에 감겨 있는 하얀색 구슬을 꺼내 보였다. 이것은 원효 대사가 분황사를 떠나기 전 지운에게 맡겨 둔 지열 스님의 사리였다. 또한 보통 사리와 다르게 맑은 흰 사리의 속에 3개의 삼국을 뜻하는 붉은 색 반점과 통일을 뜻하는 짙은 검은색의 둥근 점은 지열의 사리를 뜻하는 것이었다. 이것을 본 원효대사가 자객에 대한 경계심을 풀며 거침 숨을 내뱉으며 말했다.
“지운 스님은 언제나 지열 스님의 사리를 몸에 지니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이를 다시 원효 대사님께 전달하고 급히 모셔오라 하셨습니다.”
“아…. 내가 너무 늦은 것은 아닌지 모르겠구나. 어서 가자.”
그들이 지운 스님의 측근임을 확인한 원효 대사와 석천은 급히 준비해 온 김유신 일가의 옷으로 바꿔 입고 급히 병사들의 눈을 피해 분황사로 발걸음을 옮겼다.

4.
원효 대사가 분황사에 도착하였을 때, 분황사 당간지주 사이로 햇빛이 그의 얼굴을 쏘아대고 있었다. 손으로 따가운 아침 햇살을 가리려는 순간, 바로 앞에 문무왕이 나타났다.
"대사……."
문무왕의 모습에 햇빛을 가리려던 손을 재빨리 거둔 원효 대사는 문무왕에게 예를 갖춰 고개를 숙였다.
"전하, 소승의 불찰로 이제야 전하를 뵈옵나이다."
"아니오. 나의 과한 욕심 때문에 대사를 힘들게 한 것 같아 미안하고 항상 고맙게 생각하고 있소. 갔던 일은 무사히 마쳤소?"
"예, 전하. 그 돌 항아리에 계신 분을 부처의 화신과 같이 여기고 모셔, 남쪽 끝까지 고행했습니다. 그리고 전하께서 말씀하신 바다와 강을 끼고 있는 알려지지 않은 곳을 찾아 제자들에게 작은 사찰을 짓도록 명하고 돌아왔습니다."
"그 산은 어디에 있소?"
"경주 정씨 12대손 정년(鄭年)이 태수로 있는 전야산군이라는 곳의 산입니다. 산의 정면에는 끝이 없는 남해바다와 하늘을 찌를 듯한 절벽이 있습니다. 반대쪽은 평화로이 흐르는 해소(海塑)강물이 흐르고 있으며, 산세가 험악하여 지역 사람들 또한 출입을 쉽게 할 수 없는 곳이라 하옵니다. 아마도 다음 달이면 돌 항아리를 위로할 사찰이 완공될 것입니다. 전하."
"내가 했어야 마땅할 일을 그대가 해 주었구려."
말을 끝으로 옆으로 돌아선 문무왕의 옆얼굴에 사뭇 슬픔이 넘쳐흘렀다. 원효 대사는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 채 문무왕의 쓸쓸한 옆모습만을 바라 볼 뿐이었다.
'내가 다시 한 번 너에게 외로움을 짊어지게 하였구나. 언제나 외로움만을 주고 있구나…….'
반갑게만 이어질 것 같았던 그들의 재회는 문무왕의 쓸쓸한 모습에 주변 공기마저 측은해졌다. 야속한 햇살은 그들을 향해 더욱 강렬하게 내리쬐고 있었다.

5.
676년 나당전쟁이 막바지에 이르렀을 무렵, 당의 수군을 금강 하류 기벌포(伎伐浦)에서 패퇴시킨 기쁘고 기쁜 삼국의 완전한 통일을 한 그 시각, 문무왕은 왕실에 없었다. 하지만 서라벌 4개의 성문 밖에서는 삼국의 진정한 통일을 기뻐하는 백성들의 만세소리가 끊이질 않았고, 왕의 웃음소리 대신 신료들과 장수들의 웃음소리와 풍악소리가 그칠 줄을 몰랐다. 하지만 자눌(자의왕후)은 면회를 일절 사절하고 침실에서 휴식을 취하겠다는 문무왕의 말에 이상함을 느끼고 왕의 침실에 소리 없이 접근했다. 왕의 처소에 발을 내딛는 순간,
"웬 놈이냐!"
자눌의 인기척을 느낀 문무왕의 노한 목소리가 허공에 울려 퍼졌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자눌이 어찌할 바를 몰라 왕이 있다는 것을 확인했음에도 불구하고 처소로 쉽게 발을 들이지 못했다. 하지만 이내 평정심을 유지하며 입을 떼었다.
"어머나, 깜짝 놀랐습니다, 전하. 이렇게 기쁜 날 전하가 몸이 좋지 않아 함께 기쁨을 나눌 수 없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전하의 안위가 걱정되어 저도 모르게 그만……."
"……."
"가까이 오면 올수록 스산한 침묵만이 맴돌기에, 소녀의 직감으로 불길하다 판단되어 이리 행동하게 되었습니다. 소녀를 죽여주시옵소서."
자눌의 말에 문무왕은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비꼬는 듯 말했다.
"참으로 이상하구나. 내가 필히 김유신과 김삼광에게 특별히 일렀거늘, 너는 그 말을 전해 듣지 못했단 말이냐? 당최 무엇이 궁금하였기에 여기까지 어려운 발걸음을 하였단 말이냐?"
자신의 속을 꿰뚫는 듯한 문무왕의 말에 자눌은 그만 할 말을 잃은 듯하였다.
"그게 아니오라, 소첩은 전하의 안위가."
"시끄럽다. 앞으로 나의 명이 있기 전까지는 절대로 나의 침소에 발을 들여놓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보기 싫구나. 너도 썩 물러가거라."
"네, 전하."
자눌이 혼비백산하여 왕의 처소를 벗어나는 것을 지켜 본 김유신은 왕의 처소를 향해 가로피리를 불기 시작했다. 이 소리가 멎은 수 분 후, 정 6품의 옷을 입은 한 사내가 나와 김유신과 함께 급히 궁을 빠져 나갔다. 그리고 김유신의 신호와 함께 김흠순[金欽純] 장군이 바삐 왕의 처소로 들어갔다. 김유신과 문무왕의 계책이 비로소 완성이 되는 순간이었다.

6.
서라벌에서 남쪽으로 달리고 있는 한 무리.
신라 전역이 통일에 대한 환희와 감동에 도취되어 있을 무렵, 반비(半臂)의 행상을 하고 있는 한 남자와 건장한 사내 여럿이 말을 타고 빠르게 남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쉬지 않고 꼬박 3일을 달려 그들이 도착한 곳은 남해의 땅 끝 산에 위치한 사찰이었다. 나무색이 바래지 않은 이 사찰은 낯선 이의 방문을 온 몸으로 거부하는 듯 세찬 소나기를 내리고 있었다. 산 아래 저잣거리에서의 흥겨운 만세소리가 산 속 사찰에까지 메아리쳤다. 말 위에 우두커니 앉아있던 반비 차림의 사내가 말에서 내려와 손으로 소나기를 느끼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천천히 고개를 들며 하늘을 바라보았다.

"갑작스런 소나기와 만세소리의 메아리라니……. 허허, 참으로 슬픈 소리로구나…."
"전하, 사흘을 꼬박 달려 오셨습니다. 어서 사찰로 드시지요."

뒤따르던 사내 중 하나가 걱정스런 눈빛으로 그에게 재촉을 했다. 하지만 그는 꼼짝도 하지 않은 채 비를 맞고 서 있을 뿐이었다. 무거운 침묵이 흐른 후 그는 다시 입을 열었다.

"나는 쉴 수가 없는 사내이니라."
"무슨 말씀이신지…."
"어서 사찰에 들러 원효대사가 말한 북쪽 손님이 찾아왔다고 전하여라."
"네, 전하."

문무왕은 유신을 사찰로 보낸 후 그녀가 있을 보광사를 바라보며 거센 소나기를 하염없이 맞으며 슬픔의 눈물을 흘렸다. 비와 함께 흘러내리는 왕의 눈물을 모두가 모르는 체하며 주변 경계에 온 신경을 집중하였다. 그 때 김유신이 사찰에서 하얀 돌 항아리를 가지고 나오는 모습에 문무왕은 그만 다리에 힘이 풀려 스스로 무릎을 꿇고 말았다. 처절한 왕의 모습에 모든 이들이 그를 따라 무릎을 꿇었다. 왕에게 돌 항아리를 전달한 김유신은 모든 이에게 하산을 명령하고 그들을 뒤따랐다. 홀로 남은 문무왕은 정확히 1년하고 석 달이 지나서야 돌 항아리 속에 한줌의 재가 되어 있는 정연을 아무런 말없이 바라보았다. 그리고 단 한시도 잊은 적 없던 그녀를 꼭 안은 채 추억하기 시작했다.

7.
675년 서라벌 궁내
붉은 노을이 단풍에 가려 쏟아지던 유시(酉時)경.

문무왕은 궁중 내부를 산책 중이었다. 그 옆에 자눌(자의왕후)은 쉬지 않고 입을 놀렸다. 자눌의 매력적인 입술과 기품 있는 언행에도 왕의 용안은 몹시 어두웠는데, 이는 겉보기와는 다른 그녀의 속을 이미 알아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자리를 당장에 피하지 않은 단 한 가지의 이유는 자눌이 데리고 온 아이 때문이었다. 붉은 노을만큼이나 빨간 볼을 가진 한 여자아이의 첫 모습은 그의 눈길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675년, 이 당시 왕은 당나라와의 갈등으로 대외문제에 온통 정신이 팔려 있었으며 자눌은 신라의 내정문제들을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이끌 시간을 벌기 위해 왕에게 온갖 아첨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당나라와의 전쟁이 막바지에 이르렀음을 알아차린 자눌은 다른 계략을 꾸민다. 이는 자신의 수하에 있는 꼭두각시를 출현시키는 것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서라벌과 멀지 않는 곳에 절세 미녀로 정평이 난 안동의 권정연이 꼭두각시로 낙점이 되었다. 자눌은 정연이 왕의 마음에 들게 하기 위해 왕에 대한 모든 정보를 암기하도록 하고, 당시 신라에서는 보기 힘든 중국의 화장법과 향수를 모두 공수해 왕을 현혹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왕은 자눌의 계략에 놀아날 만큼 어리석지 않았고, 이 계략의 물증을 잡기 위해 정연과 함께 하는 시간을 늘렸다. 한 가지 특이한 것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왕의 품에 안기도록 하라는 자눌의 명과는 달리 정연의 행동은 언제나 조심스러웠다는 점이었다. 화사한 화장으로 치장한 얼굴과 코끝으로 전해오는 지독한 향수의 향은 자눌이 보낸 어떤 궁녀들과도 다를 바 없었지만, 언제나 1척 정도 떨어져 있는 것과 말을 아끼는 정연의 모습은 왕이 자신에게 접근한 목적을 의심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그러던 어느날, 정연이 처음으로 왕과의 면담을 청하며 홀로 처소에 들었다. 결연한 표정으로 왕의 곁에 다가온 정연이 무언가를 결심한 듯 입을 떼기 시작했다.
“전하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정연의 뜻밖의 방문과 태도에 무언가를 느낀 왕이 의아한 눈빛을 보냈다.
“무엇이냐?”
“부디 소녀를 죽여주시옵소서.”
정연은 눈물을 쏟아내며 왕 앞에 무릎을 꿇었다. 정연의 갑작스런 행동에 당황한 왕이 무릎 꿇은 정연을 일으켜 세우며 말을 이어 나갔다.
“왜 그래야 하느냐?”
“전하를 속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상치 못한 답변에 놀라 문무왕이 되물었다.
“무엇을?”
“제 아버지와 집안의 번성을 위해 전하를 속이고 있나이다. 그리고 이보다 더 큰 죄는…….”
“더 큰 죄는?”
“감히 전하를 저의 가슴에 품고 산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소녀를 죽여 궁에서 추방시켜 주시옵소서.”

왕은 처음으로 정연의 눈을 봤다. 항상 땅을 보고 말하던 정연의 눈은 정확히 왕의 눈을 응시하였으며, 눈에는 눈물을 참으려는 안간힘이 보였다. 왕은 드디어 자눌의 음모를 밝힐 수 있는 기회가 왔다고 생각했다. 분명히 기뻐해야 할 만한 일이었지만 자신의 얼굴은 웃고 있지 않았고, 오히려 침통한 표정을 짓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한 왕은 우선 앞에 있는 정연을 물러나게 했다. 자신의 측근인 우의정 김찬석[金燦淅]과 신료들의 물음에도 그들이 기뻐할 정보를 말 할 수 없었다. 왕은 정연이 왜 목숨을 걸 만한 말을 나에게 했는지에 대한 의문과 자눌의 꼭두각시인 정연의 안위를 걱정하는 자신을 발견한다. 그리고 정연의 말을 되뇌어 보았다.
‘감히 전하를 저의 가슴에 품고 산다는 것입니다.’
그제서야 왕은 정연이 말한 것에 자눌이 만들어낸 계략의 물증보다 더 큰 것이 있음을 깨닫는다. 자신의 집안과 가족을 위해 이곳으로 왔지만 자신에 대한 사랑 때문에 모든 것을 버리려는 한 여자의 마음을 느끼게 된다. 이 후로부터 둘은 진솔한 대화와 함께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고 정연을 자눌의 손아귀에서 꼭 구해주겠노라고 약속한다.
이 때, 궁내에서 한 통의 밀지가 발각된다. 발신자는 미상, 수신자는 정이라고 쓰여 있는 밀지의 내용은 왕의 시선을 혼잡하게 할수록 우리의 미래는 앞당겨진다는 내용이었다. 즉시 감찰부는 이 밀지를 역모로 단정 짓고 역모자 색출에 나선다. 그리고 최종 역모자의 배후로는 정연이라는 결과가 내려진다. 왕과 가장 밀접하게 접근할 수 있는 자, 밀지 운반책의 증언이 그녀를 단숨에 역모자로 만들어 버렸다. 자눌의 옛 이름에는 ‘綎’이라는 한자어가 포함되어 있었으며, 혹시라도 발각될 경우 정연의 이름을 언급하라는 자눌의 교육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왕의 절대적 옹호 속에서 자눌이 직접 그녀에게 고문과 매질을 하며 문책했다. 하지만 5일 동안 그녀의 입에서는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매일 묘시에 왕은 그녀를 찾아와 모진 상처와 몰골을 보고 울부짖었다. 왜 말하지 않느냐는 왕의 물음에 정연은 한없이 때를 기다리라는 말만 반복하였다. 이때 우이방부 김찬석(金燦淅)이 옆으로 왔다.
“증거가 너무나 치밀합니다. 이를 통해 자눌은 명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궁궐에서 수십분 거리에 병사 5천이 대기 중이라는 전갈을 받았습니다. 이 상황에서 왕이 반역자의 손을 들어주는 순간, 왕에게 버림받은 불쌍한 중전과 이를 밀어 내려는 왕과 첩이 꾸민 자작극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민심과 함께 도성을 함락시키려는 그들의 수작입니다.”
정연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전하를 해하려는 첫 초석을 마련한 자로서, 마지막만은 전하를 위해 스스로 자눌에게 이로운 일을 하지 않겠노라고 다짐한다. 왕은 정사를 뒤로하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자눌에게는 외적으로 약한 모습을 내비췄으나, 뒤편으로는 중국 선종의 선구자인 도일의 제자인 도의(道義)를 신라로 불러들여 당시 자눌의 가장 큰 세력의 한 편인 교종을 무너뜨릴 계책과 성주와 달구벌의 지방호족과의 연합으로 왕권의 강화와 자눌세력의 무력적 축출을 계획했다. 하지만 자눌의 세력은 신라의 땅 어디에도 존재했다. 언제나 왕의 주변에는 권력과 재물에 눈이 먼 변절자들이 존재했으며, 문무왕은 자신의 눈앞에 무릎을 꿇은 정연과 마주 한 채 그녀의 유채꽃 같은 아련한 목숨이 떨어지는 모습을 지켜보아야 했다.

날카롭게 슬퍼 보이는 보슬비가 내리는 저녁 일경(一更).
마지막 사약을 받은 정연의 눈동자는 흔들림이 없었고, 처량하지 않았으며, 곧게곧게 왕을 응시하며 유채꽃 같이 살포시 내려앉아 숨을 거두었다.

8.
676년 현재, 보광산의 보리암.
문무왕이 기억하는 정연은 권력에 아첨하는 인물들의 제물이 아닌 순수한 여자였다. 그리고 자신이 사랑한 한 여자였다. 하지만 자신은 그 여자를 지켜주지 못했던 아주 나약한 남자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에게 속죄하며 사찰에서 함께 못 다한 이야기의 꽃을 피웠다. 아무도 볼 수 없었고 남자의 구슬픈 목소리만이 산에 메아리쳤지만, 왕의 귀에는 정연의 고운 음성이 뚜렷하게 들려올 뿐이었다.
한줌 재가 된 정연과 하루를 보낸 문무왕은 다음날, 정연을 보내기 위한 채비를 갖추었다. 해가 맑게 내리쬐는 아침에는 보리암에 올랐다. 절벽 끝에 위태롭게 선 한 사내는 해를 보며 무엇인가를 휘날리기 시작했다. 바람이 정연을 휘날리어 바다로 인도하였다. 그리고 초승달이 밝은 저녁에는 마지막 남은 정연을 개울가에 적시기 시작했다. 개울가를 따라 하얀 가루들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이제 이 산은 후궁으로 뒤덮일 것이라고 왕은 생각했다. 하지만 원망스럽도록 푸른 하늘을 바라보며, 보리암 절벽 아래의 바닷물에 다리를 적시고서는 바다에 비친 자신을 한없이 바라보았다.

9.
681년, 서라벌 궁내 왕의 처소(문무왕 58년)

통일 신라를 이룩한 지 어느덧 6년, 그 강대하고 강단이 넘치던 삼국통일의 왕은 그 어디에서도 찾을 수가 없었다. 왕의 처소에는 있는 사람은 병마와 싸우며 쇠약해진 한 명의 노인뿐이었다. 임종이 머지않았음을 느낀 문무왕은 훗날 신문왕이 될 아들을 곁으로 불렀다. 그는 아들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기고 쓸쓸하게 인생을 마감했다.

“꼴 베고 소 먹이는 아이들이 그 위에서 노래하고, 여우와 토끼가 그 옆에서 굴을 팔 것이니, 분묘를 치장하는 것은 한갓 재물만 허비하고 역사서에 비방만 남길 것이요, 공연히 인력을 수고롭게 하면서도 죽은 영혼을 구제하지 못하는 것이다. 가만히 생각하면 마음이 쓰리고 아픈 것을 금치 못하겠으되, 이와 같은 것은 내가 즐기는 바가 아니다.”

신문왕과 대신관료들은 이 유언을 선대의 봉분처럼 크지 않은 봉분을 만들라 하는 뜻과, 불교식의 화장을 하라는 뜻으로 의견을 나누었다. 이에 따라 화백회의를 개최하기에 이른다. 신라인들이 신령스럽다고 여겼던 왕경(王京) 주위인 동쪽의 청송산(靑松山), 남쪽의 우지산(于知山), 서쪽의 피전(皮田), 북쪽의 금강산(金剛山)에서 화백회의는 시작되었다. 이때 화백회의의 주재자(主宰者)인 상대등(上大等) 김삼광(金三光)의 선언으로 회의는 시작되었고 만장일치가 될 때까지 귀족들은 서로의 상반된 생각을 고집하였다. 자눌 또한 왕의 장례를 화장으로 하는 것이 언제나 말해오던 왕의 바람이었다는 거짓 증언을 한다. 이는 문무왕의 봉분조차 남지 않는다면 그의 업적 또한 시간이 갈수록 쉽게 잊혀져 갈 것이며, 어린 신문왕을 왕의 자리에서 빨리 물러나게 하고 자신이 왕이 되려는 야욕으로 인한 거짓 증언이었다. 많은 귀족들은 이런 야욕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강자의 손에 이끌려 하나 둘 거수하게 된다. 하지만 김유신 장군과 김신흠 장군이 화백회의 중단을 요청하며 회의장에 나타나게 된다. 그들의 손에 들린 것은 문무왕이 자눌에게 보내는 마지막 선물이었다.

'자눌, 그대는 언제나 신과 함께 궁을 지켜나갔다. 하지만 권력과 야욕에 지배당하는 그대의 눈동자를 보며 언제나 안타까웠다. 또한 그대가 1년 전부터 나에게 바치던 탕약의 주재료를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대에게서 다음 왕을 지켜내고 이 신성한 궁에서 몰아내기 위해서는 나와 함께 주검이 되어 나가는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신의 아름다운 나라를 너와 함께 등지려 한다. 단 그대의 시신과 함께 궁을 떠나겠다. 다음 생에서는 부디 야욕과 권력이 없는 세상에서 만나세. '

문무왕의 유언장을 읽고 나자 허둥지둥하던 자눌과 측근들은 감찰부에 압송되었고, 곧 장례에 대한 유언이 시작되었다.

'세월이 가면 산과 계곡도 변하고 세대 또한 흐름에 따라 변하는 것이니, 오왕의 북산 무덤에서 어찌 향로의 광채를 볼 수 있겠는가. 위주의 서릉에는 동작이란 이름만 들릴 뿐이로다. 옛날 만사를 처리하던 영웅도 마지막에는 한 무더기 흙이 되어, 나무꾼과 목동들이 그 위에서 노래하고 여우와 토끼는 그 옆에 굴을 팔 것이다. 그러므로 헛되이 재물을 낭비하는 것은 역사서의 비방거리가 될 것이요, 헛되이 사람을 수고롭게 하더라도 나의 혼백을 구제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러한 일을 조용히 생각하면 마음 아프기 그지없으니, 이는 내가 즐기는 바가 아니다. 숨을 거둔 열흘 후 바깥 뜰 창고 앞에서 나의 시체를 서국의 법식으로 화장하여 신라 바다 중에 뿌리어 신라의 용이 되어 신라를 지키게 하여라. 원근에 포고해 백성들이 그 뜻을 알게 하고 다음 왕이 이를 시행하라.'

김유신 장군의 유언장 낭독 후 궁 안에는 통곡소리가 한참 이어졌다. 김유신 장군의 눈가에도 눈물이 맺히었다. 언제나 꼿꼿한 절개와 근엄한 모습, 그리고 나라의 근심을 항상 짊어지고 세상을 풍미했던 왕의 마지막을 모든 사람들과 함께 슬퍼했다.

10.
문무왕의 서거 전날
문무왕이 김유신을 자신의 처소로 불렀다. 김유신과 마주앉은 문무왕이 품안에 미리 준비해 놓은 문서를 꺼내어 펼쳐 보였다.
"이것이 내가 미리 써 둔 유언장이네. 내가 왜 자네에게 이 유언장을 주는지 아는가?"
예상치 못한 왕의 행동에 당황한 김유신이 왕의 앞에 무릎을 꿇으며 말했다.
"전하 이것이 무엇인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전하께서 이루어 놓은 삼국의 대업을 이어 나가셔야지 이렇게 나약한 말씀을 어찌 하십니까."
너무나 하얗고 앙상한 왕의 손이 김유신의 손을 붙잡았다.
"나는 이제 갈 때가 다 되었네. 이제 자눌의 약이 온몸으로 퍼져 몸이 내 마음대로 되지를 않아."
김유신이 깜짝 놀라 급히 일어나서 왕에게 말했다.
"자눌의 약이라니…. 무슨 말씀이십니까, 전하?"
왕은 웃으며, 김유신에게 말했다.
"자네는 이 유언장을 가지고 나의 장례에 대한 화백회의가 끝나기 직전까지 함구하고 있어야 하네. 언제나 나의 옆에 있어줘서 고마웠네. 미리 인사해 두겠네, 친구."
친구라는 말에 김유신은 참던 눈물을 흘렸다.
"나약한 말씀 하지 마십시오, 전하. 지금이라도 자눌과 그 일당이 사용한 약을 감별하여 해독제를 구해 오겠습니다."
"내 몸은 내가 잘 알지. 그러기에는 이미 늦었구나. 아, 그리고 장례는 감포 앞바다에 해주게. 바다가 남으로 흐르는 가을에 나를 뿌려주게나. 그 아이에게 갈 수 있도록, 부탁하네."
"……. 아직도 그 아이를 품고 계셨나이까."
왕은 창밖에 지저귀는 새들을 보며 말했다.
"단 한 번도 잊은 적이 없지. 내가 잊으면 누가 그 아이를 기억해주겠나. 하지만 이제 곧 만날 것이니 그 무엇도 두렵지 않다네. 이제 그만 물러가 보게."
어쩌면 이것이 왕의 마지막 모습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김유신은 흐르는 눈물을 애써 참으며 왕의 앞에 섰다.
"소장은 마지막으로 인사 올리겠나이다. 부디 극락왕생 하소서, 전하."

<당선소감-권혁찬>

"우물쭈물하다가 이렇게 끝날 줄 알았다"는 문구가 오래된 수첩 속에 있었다. 언제 적었던 것인지, 날짜를 알 수 없는 어느 날의 메모가 아주 난잡하게 적혀있었고, 나중에야 알았지만 이 문구는 지난 1925년 노벨상 수상자인 버나드 쇼의 묘비명이었다. 아무것도 정해진 것 없던 대학시절 나는 정성껏 깨끗한 글씨체로 한 페이지를 다 채운 걸 보니 이 글귀를 몹시 신봉하고 있었던 듯했다.

청년시절 아무도 지지하지 않은 이상을 향한 첫 걸음을, 나는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은 무심함으로 무마하려 여태껏 애쓰고 있었다.

그러다 당선소식을 담은 한 통의 전화가 대학시절에 미래에 대한 불안감 속에서도 미약하게나마 타고 있었던 지금은 꺼져가는 창작에 대한 갈증을 다시 한 번 느끼게 해주는 발화점이 되었다.

지난날 삶의 냉혹한 현실은 살얼음판을 걷게 했고, 창작의 카타르시스는 잊어버린 채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고 싶은 나태함만으로 살아온 지난날을 돌아볼 기회를 주신 심사위원님과 신문사 관계자 분들께 감사드린다.
문경시민신문 기자  ctn6333@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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