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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마을운동 소고(小考)
글쓴이 / 농업회사법인(주)화목 회장 김용쇠
문경시민신문 기자 / ctn6333@hanmail.net입력 : 2015년 11월 24일(화) 0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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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농업회사법인(주)화목 회장 김용쇠-현재 문경에서 버섯귀농-귀촌-귀향마을을 추진하고 있다.
ⓒ 문경시민신문
■ 가난한 어린 시절

필자는 지난 1946년 경북 청도군 각북면 지슬동(芝瑟洞) 빈농의 가정에서 태어나 8세에 아버님을 여의고 솜씨 좋은 편모슬하에서 3형제 중 가운데로 태어났습니다. 소릿길을 걸어서 초등학교를 다녀야 했고, 하루 세끼 밥을 배불리 먹을 수 없는 환경이다 보니 식탁엔 먼저 앉아야 하고, 공동반찬은 먼저 먹고 국과 밥은 나중에 먹는 식탁에서 경제논리를 터득하였습니다. 배려와 희생과 사랑이 전제된 가족공동체 속에서 한 숟갈이라도 많이 먹어야 하는 경쟁 속에 잇속을 챙기는 법을 배워 지금도 국과 밥은 나중에 먹는 습관으로 자리 잡게 돼, 지금도 가끔 국과 밥을 남기는 식습관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50여 년 전 어린 시절을 회상할 때마다 저의 형님은 가운데 용쇠는 욕심이 많은 것으로 표현하기도 하여 민망할 때가 많았습니다.

중학교는 12 Km(30리)를 매일 걸어서 다녀야 했는데, 아침에 등교하면 배가 고파 1시간 수업을 마친 후 도시락을 먹어치우고 수업 후 퇴교해 귀가 길에는 허기로 허우적거린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요즈음처럼 길가에 사과밭이나 과일밭이 그 땐 없었길 망정이지, 지금 같았으면 문제아가 되었겠다는 아찔한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삼형제 중 가운데는 원래 문제아가 많다는 통계가 있다는데 형과 다투다 반항하면 “왜 형께 반항하느냐. 동생이 져야지...”하고, 또한 동생과 싸우면 “형이 참아야지. 왜 어린 동생을 때리느냐?”고 꾸짖으니 가운데는 샌드위치 신세라 화가 나서 길거리에 나가면 회초리를 만들어 호박순이나 나무의 새순을 탁 쳐서 날려버리는가 하면 애호박을 망가뜨리는 등 화풀이를 하는 통에 문제아가 될 소지가 많았지만 지금까지 문제아가 되지 않은 것만으로도 큰 다행이라 여깁니다.

시골에서의 중학교 시절엔 배려도, 사랑도, 희생도, 인내도, 중용도, 처세도, 체면도, 자존심도 모른 체 그래저래 자랐습니다. 가난의 역경 속에 기적적으로 대구에서 K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의 S대학이나 K대학의 법대를 가서 검·판사가 되고 싶었으나 어쩌다 본 서부영화 ‘OK목장의 결투’에 핀이 꼽혀 무리지은 소떼들과 말을 탄 목동들의 낭만적 모습이 그리워 48대 1의 비율인 건국대학교 축산과에 입학하여 난생처음 아침마다 부잣집에만 배달되는 건국우유 한 컵을 마셔보는 여유를 즐기기도 전에 기숙사 생활을 팽개치고 휴학을 하고는 육군에 지원 입대하였습니다.

■ 월남전 파병, 죽음의 문턱에서 살아남다.

논산훈련소를 거쳐 마침 배치된 곳이 맹호사단 628포병대대였습니다. 곧바로 맹호사단과 해병대 1개 여단이 전투병 1진으로 월남전 파병결정이 났습니다. “죽고 사는 것은 하늘에 있다 하니, 여기서 살 놈은 월남에서도 살고 여기서 줄을 놈은 월남에서도 죽는다”고 생각하여, “인명은 재천이다”란 말만 믿고 파월을 결심했습니다. 지난 1965년 10월 3일 부산 3부두에서 중·고생들의 태극기 환송을 받으며 귀신 잡는 해병대와 함께(해병 여단엔 155 미리 포가 없었기 때문에 지원 파견된 곡사포 부대임) 파월돼 월남의 남부 해안 캄란만에서 주둔지를 배정 받고 진지를 구축하고 방공호를 파고 무장해지도 못한 체 밤잠을 자려고 하면 밤새 포탄과 총성이 고막을 울렸으며 조명탄이 밤을 밝혀 불안에 뜬눈으로 밤을 새우며 전쟁터의 생활에 길들여져 가야만 했습니다. 1개월이 지난 후에는 포소리와 총소리도 자장가로 들렸습니다. 간혹 작전 명령에 의해 출동, 광활한 들판에 소떼들의 방목 현장이 전쟁터가 된 죽음의 광야에서 하루 1달러에 목숨을 걸었지만, 우리나라 정부에서는 우리들의 목숨을 담보로 받은 달러로 경부고속도로 건설비로 충당함은 물론, 국가재건의 종자돈으로 사용하였다는 사실을 몇 년이 지난 후에야 알게 돼 큰 자부심을 느꼈습니다. 당시 필자는 한 달에 30달러를 집으로 송금하고 31일이 되는 달 1일 분은 필자의 비상금이고 용돈이었습니다. 송금된 돈으로 복교하여 학업을 계속할 수 있겠다는 희망 가운데 웃고 울면서 정글과 빗속을 헤매고 다녔습니다. 그래도 군대 보급품이 풍부하니까 팬티나 런닝 등 군복을 분실할 염려가 없으니 단체기합을 받는 일이 없었습니다. “모두가 풍족하면 도둑이 생기지 않는다”는 진리에서 보면, 한국 내와 월남전에서는 확연히 달랐습니다. 척후와 수색을 하다보면 죽고 사는 문제는 자기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점심을 같이 먹고 먼저 일어서는 사람이 총 맞아 죽는가 하면 살아야 할 사람이 있는 곳에는 포탄이 떨어져도 불발탄이 돼 죽지 않게 되는 경우를 많이 보게 돼 “내 것은 내 맘대로 하지만 내 맘대로 못하는 것은 내 것이 아니고 주인이 따로 있겠구나. 내가 죽고 사는 생명은 주관자가 따로 있는 것이구나. 내 맘대로 못하니까... 그래서 그 주관자가 천지와 나를 창조한 하나님이다”란 진리를 전쟁터에서 실감했습니다.

■ 하나님을 믿게 되고, 대학 수업을 하며 새마을 이론을 접하다.

필자는 귀국과 동시에 찾아간 고향 교회에서 기독교인이 되었고, 필자의 장남은 현재 목사가 되어 복음을 전도하는 사명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월남전 때 마침 1년의 월남의무를 마치고 귀국해야겠다고 귀국 준비를 서두르는 중에 한국군 최초의 월남어 통역관 교육생 모집 광고가 각 부대로 하달됐고, 1개 사단 내에서도 대재(大在)의 학력을 가진 병사가 몇 명 정도로 학력 빈곤의 시대인지라 대학 재학 이력의 필자는 1기생 1호의 월남어 통역관이 됐습니다. 자그마치 월남어 통역관 월 수당이 50달러였습니다. 당시 환률이 800원 전후였고, 따지면 큰돈이었기에 경쟁이 심했습니다. 통역관은 1년 더 월남 체류를 연장하는 특전과 조건이 있었는데, 이것이 필자에게는 정말 행운의 기회였습니다. 대대급 이상에 통역관이 배치되니까 월급과 수당 외에 부수입이 많아서 귀국 후 대학 졸업까지 학비는 염려 없었습니다. 당시 철조망 너머 월남여인들과 전우로부터 사랑의 통역 요청도 많았으며 맛있는 특식 대접도 받아 행복한 특수 병사가 되기도 했지만, 학업을 포기할 순 없었기에 귀국하여 복교를 했습니다.

이때 필자의 대학 지역사회개발학과 주임인 주권 교수님의 친아우인 주원 건설부장관께 논문, 책, 메모 등 제반 자료를 전달하는 심부름 전담자가 된 것이 필자의 운명을 결정짓는 계기가 됐습니다. 그때 전달한 자료들이 후일 새마을운동의 원리가 됐고, 새마을운동의 원리나 내용, 그리고 추진방향을 조금은 감지하고 있었습니다. 덴마크의 달가스나 이스라엘의 키브스나 한국의 가나안 농군학교 김용기 장로님의 개척정신과 잘 살기 운동 등을 본받아 내 고향 농촌으로 돌아가자고 생각했습니다.

■ 고향에 돌아가 새마을 사업을 하다.

의사는 병자를 위해 존재하듯 우리는 농촌을 위해 대학의 공부를 했으니 가난한 농촌 부흥을 위해 농민운동을 하자고 의지를 모으고, 의기투합한 친구 두 명과 함께 오지인 내 고향으로 돌아가자고 결심했습니다. 그러자 “대학 나온 놈들이 중앙청 청소부라도 할 것이지 왜 오지인 농촌에 오느냐”고 반대가 심했고 형제 끼리 심한 갈등이 생기기도 하였습니다. 항산지역사회개발주식회사(恒産地域社會開發株式會社)를 설립하여 생필품의 도소매, 지붕개량, 부엌개량, 도로개설, 농지개량, 수로개설 등의 일과 농작물의 소득증대와 축산업의 시작 등으로 농촌 부흥을 위한 인생을 새 출발하였습니다. 이즈음 새마을운동이 시작되어 필자의 인생과 새마을운동 45년사는 어쩌면 일치하는 면이 있어 필자가 새마을운동 45년사의 증인이라 해도 과언은 아닐 듯합니다.

1. 새마을운동 발상지 신도마을

고(故) 박정희 대통령께서 지난 1969년 8월 초순 경상남도 수해 복구 시찰 시에 경부선 철도변에 위치한 이 마을의 개량된 지붕, 정비된 하천, 정리된 마을안길 등이 잘 갖추어진 모습을 보고 새마을운동을 착상, 지난 1970년 4월 22일 지방장관 회의 시에 주창한 것이 바로 새마을운동의 효시가 됐습니다. 당시 신도마을의 안길에 인접한 동네 소하천이 무너져 길로 물이 넘쳐났습니다. 동네 사람들이 십시일반 그 소하천을 정비하고 길을 고치고 정비하였는데, 이것이야말로 새마을운동의 근간인 근면, 자조-자립, 협동 정신에 의한 결과물로 보게 됐습니다.

2. 범국민적인 지역사회개발운동의 시작

지난 1970년 4월 22일 한해대책 지방장관 회의에서 고(故) 박정희 대통령께서는 수재민복구대책과 넓은 의미의 농촌재건운동을 착수키 위해 근면, 자조-자립, 협동 정신을 바탕으로 한 새마을 가꾸기 사업을 주창하고, 이것을 ‘새마을을 가꾸기 위한 운동’으로 부르기 시작한데서 비롯됐습니다. 그 후 지난 1971년 전국 32,267개 행정 동리에 시멘트 335포씩 균일 무상으로 지원하였고, 부락민 자체 노력과 비용(자금)을 충당하여 마을 숙원사업을 하게 했으며, 결과를 점검하여 잘 시행한 16,600개 부락엔 2차로 500포대의 시멘트와 1톤의 철근을 공급하여 자발적 협동 노력으로 마을을 개량하도록 장려했습니다. 이어 전국 새마을운동연합회의 결성과 범국민 운동으로 이를 전개하면서 1년에 한차례씩 전국 새마을운동 전진대회를 개최, 성공사례를 발표케 하여 이를 격려-시상케 하여 자조-자립으로 소득증대사업을 개발할 수 있도록 유도했고, 도시와 직장, 공장으로 확대하여 의식개혁, 근면, 자조, 협동을 생활화하도록 범국민적 운동으로 확산, 전개해 나갔습니다.

3. 새마을운동(지역사회개발운동)의 원리

학문적 원리로 볼 때 사회학에서 지역사회개발(Community Development, 약칭 C·D론이라 함)의 원리가 ○ 정신혁명(개혁) ○ 기술혁명(개발) ○ 생활혁명(환경개선)이 근간이고, 개발 순서상 정신혁명 완수->기술혁명 완수->생활혁명 완료가 순서지만 정신혁명(개혁)은 교육을 통한 의식개혁이므로 교육은 백년대계이니 교육을 하자니 경제가 뒷받침돼야 하고 오랜 시간이 소요돼야 했습니다. 당시 1인당 GDP가 62년도 87달러로(지난 1996년 12,587달러, 2015년 28,338달러로 세계 11위 임)는 현실적으로 어려운 과제였습니다. 우리 국민은 양복을 입히면 먼지 위에 앉지 않고 먼지를 털고 앉지만, 작업복이나 청바지를 입히면 먼지가 있어도 들썩 앉습니다. 이러한 국민적 습관에 착안하여 환경개선을 통한 생활혁명을 먼저 시작, 부엌개량을 하여 산림녹화의 결과를 가져와 치산치수의 효과를 얻었고, 지붕개량을 통해 볏짚의 활용으로 사료와 퇴비를 얻어 소득을 증대시켰습니다. 동네 안길 포장, 수로개선 등 환경을 개선하므로 생활의 혁명이 되면서 도시, 직장, 공장으로 확산하여 기술개발을 병행, 소득증대가 급속히 이뤄졌습니다. 현재 국민 1인당 GDP가 세계 11위인 28,338달러에 이르렀지만, 환경개선과 기술개발로 인한 소득증대가 급속히 향상된 반면, 정신혁명 즉 의식개혁은 소득과 환경에 따라가지 못하는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말하자면 돈이 사람의 행복지수에 유용하게 사용돼야 균형발전을 이룰 수 있는데, 정신수준이 미흡하여 돈을 바르게 사용할 줄 모르고 돈을 사용하는 능력이 모자라 돈이 생기면 술과 노름과 향락을 즐길 수밖에 없고, 그 결과 가정이 파괴되고 자녀 교육이 엉망이 돼 자신의 정신과 건강과 가정이 무너지는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따라서 정상적인 자본주의가 발전하지 못하고 자본주의 시대에 “돈이 최고다”하는 어불성설을 말하는 졸부의 시대가 되었습니다. 진정한 자본주의는 돈을 바르게 벌고 바르게 쓰는(약자를 위해 쓰는 것을 포함) 것을 말하는 것인데, 마치 자본주의를 돈이 최고라는 황금만능 내지 배금주의로 착각하고 있는 게 현실입니다. 따라서 사람다움이 상실된 말세지세의 탈선과 부패 현상에 물들고 있습니다. 자본주의를 말하면서 진정한 자본주의를 부인하는 이러한 처세야 말로 공산주의적 행동과 다를 바 없겠지요. 이런 가치관의 혼란과 혼탁의 결과는 상상만 해도 끔찍합니다. 좋은 환경과 기술개발로 부를 축적해놓았으나 이런 축적된 부가 사람다움과 인간행복의 필수조건이나 필요요소가 돼야 하는데, 가정과 개인과 단체의 공동선을 침해하고 파괴하는 요인이 된 것은 정신혁명(의식개혁)이 부족하여 나타난 현상이므로 이제는 제2새마을운동을 통해 의식개혁, 즉 정신혁명을 하여야 할 때가 됐습니다. 자유가 방종이 아닌 것을 깨우치고, 스스로 무질서를 통제하고 인격의 성숙, 배려와 봉사, 희생과 사랑이 어떤 가치를 지니고 어떤 열매를 맺는지, 사람이 무엇이고 왜 만물의 영장이 돼야 하는 것인지, 존재의 의미나 가치를 알고 그 역할을 충실히 하는 것에 대한 자기 성찰 내지 새로운 정신혁명(개혁)이 반드시 전개 돼야 하며, 그 실현을 위한 국민 구심점을 만들어 적극 추진해야 할 것입니다. 최근 인문학 특강이 인기를 누리는 것도 이런 차원의 새로운 시작과 동참의 확산일 것이고, 사회적 경제이론에 따른 사회적 기업의 확산은 이를 반영한 것이라 생각됩니다.

4. 새마을운동의 추진과정

● 1970년 4월 22일 전국지방장관회의 시 고(故) 박정희 대통령이 제창
● 1971년 새마을 가꾸기 운동으로 명명하여 전국 시행
● 1972년 1월 31 경기 고양 농협대학 부설 독농가연수원에 140명 입교, 새마을지도자 과정 교육실시, 이후 1,490명 교육
● 1973년 대대적 홍보
● 1973년1월16일 대통령령6458호 내무부새마을담당관실 설치하고 산하 4개과를 신설 ● 1973년 3월 7일 대통령 비서실에 새마을담당관실 설치
● 1973년 5월 31일 새마을지도자 연수원 설립
● 1973년 4,354명 새마을교육 이수자 배출, 그후 매년 6,000명 이상 교육 실시 ● 70년 80년대는 대통령 절대권력의 주도 하에 관치적 입장에 의한 한국적 민주주의 바탕에서 새마을운동 교육을 통한 근면, 자조, 협동의 이념 실현과 생활태도 혁신, 환경개선, 소득증대가 급속도로 증가하면서 기술개발이 폭발적으로 발전하여, 수출증대로 국력이 급신장하는 한강의 기적을 이루게 됐다.
● 1998년 새마을운동조직육성법에 의해 74개국에 새마을운동을 수출하고 있다.
● 2013년 6월 18일 제11차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국제자문회의에서 난중일기와 함께 유네스코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가 결정

그러나, 제5공화국 당시 공금횡령 등으로 비리온상이 돼 수사를 받는 치욕적인 수모도 겪었었다. 지난 1969년 3선 개헌과 지난 1971년 대통령선거와 비상사태 선포, 1972년 유신헌법 통과 등 권위주의 정권이 진행되면서도 새마을운동의 본격적인 전개가 이뤄졌으며, 4-H클럽, 재건국민운동, 5개년 경제개발계획은 경제발전을 목적으로 지난 1962년-1969년 5년 단위로 풍부한 노동력을 토대로 자본과 자원을 도입하여 정부 주도로 수출산업을 추진한 결과 1인당 GDP가 62년 87달러에서 96년 12,587달러로 급신장, 한강의 기적을 이루고, 2015년 28,338달러로 세계 11위를 기록하였다. <연재-다음 편에는 새마을운동의 공과 실, 제2새마을사업의 추진방향, 의식개혁을 통한 세계 속에 군림하는 선진 한국으로 가는 길을 제시해 보고자 한다.>

*필자 약력

1946년 경북 청도 각북면 지슬동(芝瑟洞) 출생
1965년 10월 3일 한국군 전투병 1진 파월(25개월) 한국군 최초 월남어 통역관
1972년 건국대학교(축산, 지역사회개발, 농업정책 전공)
1972년 항산지역사회개발주식회사(恒産地域社會開發株式會社) 설립, 농촌운동개발(새마을사업 일환) 시작
1983년 부산 동아대학교 경영대학원 AMP과정 수학
]985년 부산 부산대학교 경영대학원 AMP과정 수학
1985년 프랑스 INSEAD(구주경영대학원) 수학
1986년
한국산업카운슬러연수원 교수 역임
통일부 통일교육 전문위원(8년간) 역임
아세아연합신학대학원(일본 MD) 수학
1985년-1997년 관공서, 대학, 300인 이상 기업체, 민방위, 예비군 등 국민정신교육과 생활경제, 한반도 통일 등 3,000회 이상 강의

현)
항산지역사회개발주식회사로 출발
부산지역 중견건설사인 (주)화목주택으로 2만 세대 이상의 주택건설을 43년간 해오며 건설보국에 임하고 있음.
동아대학교 명예경영학 박사인 필자의 친형 김용완 회장을 보좌하고 있음.
제2새마을사업의 롤모델 실현을 위한 농업회사업법인(주)화목을 설립, 회장으로 일하고 있음.

가훈 “하나님 앞에서 살자” 사훈 “선한 청직이가 되자”
문경시민신문 기자  ctn6333@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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