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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의 영웅 김영삼 전 대통령 서거, 『삼가 명복을 빕니다.』
김덕룡 민추협 고문의 역작, 가칭 '민주화의 횃불, 민추협과 민산의 활동' 역사서 기고문 요약<글쓴이 / 김석태>
문경시민신문 기자 / ctn6333@hanmail.net 입력 : 2015년 11월 22일(일) 1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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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민추협 탄생 주역, 상도동 故 김영삼 대통령과 동교동 故 김대중 대통령의 포옹은 통일을 예고했지만, 고인이 된 대통령들은 저 세상에서 남-북 통일을 위한 노력을 계속하리라... | ⓒ 문경시민신문 | | 지난 22일 새벽(0시 22분경) 민주화의 거목, 김영삼 전 대통령이 서거하셨다는 소식을 필자는 이날 새벽 6시경 텔레비전을 보고 알았습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빌면서 올해 노인증이 나오는 필자로서 20대 후반의 유신독재와 30대의 5공 군부독재 타도 및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위한 민주화 투쟁의 가시밭길 인생이 새로워집니다. 대한민국의 민주화 세력을 결집시키고 대한민국 지도자로서 큰 길을 걸어오시며 역경을 견디시고 현대사를 올바르게 펼치신 고인의 명복을 진심으로 빌며 졸필을 듭니다.
 |  | | ↑↑ 김영삼 전 대통령의 명복을 진심으로 빕니다. | ⓒ 문경시민신문 | 최초로 동서화합의 민주화 단체인 민추협(민주화주진협의회 고문 <권노갑, 김덕룡>, 회장 <김무성, 박광태>)과 고(故) 김영삼 대통령께서 이끄시고 지역의 최주영 위원장(현 문경저널 회장 76)이 주도한 민주산악회 회원으로서 필자의 가시밭길 인생, 그래도 후회는 없습니다. 옥살이 뒷바라지까지 했던 아내와 92살 노모, 그리고 가족들에게는 참회의 기도를 올립니다. 민주화 열정에 미쳤던 못난 아들에 대한 이미 먼 길을 떠나신 사랑하는 아버님의 애정도 남달라 다시금 가슴이 쓰려옵니다. 그러나 현재 밝은 민주사회인데도, 아직 갈 길이 요원합니다. 그러나, 이제는 필자의 기나긴 투쟁 역사를 마감하고, 그날의 민주화 열정을 모아 공동화-황폐화 돼가는 지역 농촌에 버섯 맞춤형 귀농-귀촌-귀향 운동으로 여생을 보내리라 다짐합니다.
저 김석태(음력 1950년 10월 3일 생)는 대구교육대학(480명 졸업)을 차석으로 졸업하여 발령받기 어려운 서울 M 초등학교에 지난 1971년 3월 1일부터 지난 1975년 2월 28일까지 재직하고, 지난 1975년 3월 1일부터 1978년 2월 13일까지 서울 C 초등학교 교사로 재직하였습니다. 저의 꿈은 고교시절 가장 친한 친구들과 약속했습니다만, 가정의 어려움을 이기고 대구교대를 졸업하여, 4년제 대학을 마치고, 초등-중등-고등 선생을 거쳐, 대학교 교수가 되어 종합대학교 총장이 되려는 아름다운 꿈이었으며, 친구들은 각자의 꿈을 이루고 난 다음에 고향에서 만나자고 했습니다.
위 초등교사 재직을 하면서 가난한 남편을 만난 아내와 힘을 합쳐 동생 둘을 공부시키며, 지난 1974년 3월 1일 서대문에 있는 K 대학(현 S 대학교) 법학과 야간부에 입학하여 낮에는 교사로 밤에는 대학생으로 주경야독을 했습니다. 지난 1974년부터 1978년까지 밤에는 위 대학에서 개최된 유신반대 집회에 앞장서고, 낮에는 교사로서 유신이념 홍보와 유신교육을 해야 하는 이중생활에 불만을 품어오다 위 대학 졸업과 동시(1978년 2월 13일)에 퇴직을 했습니다.
이후 국내 굴지 대기업 입사필기시험에 합격했지만, 번번이 면접에서 낙방하고 어렵게 운수회사인 대기업 포항지점에 발령을 받고(1978년 3월 1일), 경북에서 초등교사로 재직하고 있던 아내와 결혼한 지 3년 만에 포항시 구룡포에서 신혼살림을 차렸습니다. 열심히 회사 일선에서 근무했으나 역시 현장 책임자들은 거의 다 군부 출신들이 장악하여 회사가 병영화 되어가고 있어 공채들이 설 자리가 없어졌고, 또한 일방적으로 타지 근무로 권유를 받는 등 군사독재의 마당발에 염증을 느껴 또 퇴직을 하고(1980년 초)는, 자신의 시위 전력 이력도 모른 채 실력을 테스트하기 위해 순진하게도 법대 졸업의 꿈인 사법시험에 도전했습니다.
대한민국 일출의 명소인 포항시 영일만 호미 곶에서 셋방을 얻어 그곳 초등학교로 발령을 받은 아내의 도움으로 열심히 도전했습니다. 그때 나이 30세였습니다. 간간이 경찰에서 탐문, 동향을 파악하기도 했으나, 그때만 해도 일상적인 일이라 무시했습니다. 당시 간첩이 나타나 예비군 소집이 있었는데, 어쩐지 저에게는 실탄을 지급치 않았습니다. 되돌아보니 동향파악 대상이었습니다.
아내의 근무지가 상주군 중동면 초등학교로 전보되어 사법시험 도전 3년 만에 이곳에서 그 어렵던 제24회 사법시험 1차에 합격하고, 고향인 문경으로 아내의 근무지를 옮기고 저도 고향 집에서 2차 도전을 시작했습니다. 그간에 사법시험 도전이 성공한다 해도 당초 제 꿈인 참다운 스승이 되기 위해 지난 1981년 11월 1일 경상북도교육위원회에서 시행한 중등교사임용후보자선정경쟁시험 일반사회과에 우수하게 합격하고도 합격자 명부의 유효기간(82년 3월 1일부터 84년 3월 10까지)이 만료될 때까지 임용이 되지 않았습니다. 시위전력자의 당연한 결과인데도 그땐 정말 믿기지 않았습니다. 그 이후 서울 모 사립교사 친구의 권유로 서울 모 기술고등학교 교장 선생에게 큰 대접을 해가며 강사 자리를 얻었으나, 강사 근무 중에 정식 서울시사학재단연합회 시행 일반사회 과목(합격 1에 발령 1)으로 합격, 당연히 발령을 받아야 하는데도 보증수표 시험 합격은 하나의 자신의 이력일 뿐, 정식 교사 자리는 교장과 이사장의 권한이었습니다. 저는 이때가 가장 후회되는 순간들이었습니다.
고향에 돌아와 이런저런 고초를 겪으며 많은 고민을 했습니다. 과연 이런 국가사회의 존재가치가 있는가? 국법을 공부하여 사법시험 1차의 관문을 통과했지만 책상머리에 앉아 공부하며 자신의 꿈을 이루는 것이 저와 가족과 지방과 조국을 위한 길인가? 광주사태가 발발하여 무고한 시민들이 군화 발에 짓밟히고 있는데, 저만의 안일을 위해서 공부를 해야 하는가? 참 스승이 되기 위한 자신이 조국과 후세대를 위해서 이래야만 되는가? 거의 매일같이 찾아오는 민주화 인사들과 합류해야 하지 않겠는지... 그만 고민 끝에 책상을 박차고 지난 1983년 지역 책임자로 계시던 당시 지하신문인 민주통신 최주영 편집국장 님(1940년 4월 15일 생)의 휘하로 들어가 활동, 현재까지 이웃하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때부터 위 최주영 위원장 님(민주산악회 및 민추협 문경위원장 당시 43세) 휘하의 지역 회원으로 활동하면서, 광주사태 비디오 배포, 민추협 기관지 ‘민주통신’과 민주산악회 기관지 ‘자유의 종’을 가능한 한 많이 배포하고, 대통령직선제관철 및 민주헌법쟁취 관련 각종 집회 및 시위에 주도적으로 참여했습니다.
이러한데도 공직 외의 경쟁시험은 공정한 줄 알고 자신의 궁극적인 꿈을 이루기 위해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서울 모 기술고등학교 강사를 해오면서 사단법인 한국사학재단연합회 시행의 서울지역 1987학년도 사립중등학교교원신규임용후보자전형(일반사회-모집 숫자와 합격자가 같아 필히 발령받게 돼 있다)에 합격했지만, 제가 있어야 할 자리에는 이미 다른 분들이 채워져 있었습니다. 이런 5공 정권 하의 국가사회의 처절한 모순을 겪었기에 사심 없이 더욱 민주화의 횃불을 밝힐 수 있었습니다.
그 이후 국가 정치는 고(故) 김영삼 대통령의 승부수인 삼당합당이 이뤄졌으며, 필자를 포함한 지역의 대다수 민주세력은 고(故) 김영삼 대통령의 어이 없는 비민주화 세력 공천에 반발, 꼬마 민주당에 합류하여 참 민주의 명분을 앞세운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을 비롯한 6인 지도자그룹에 합류, 또다시 가시밭길을 걸었습니다. 이 전에 이미 돈이 아닌 몸으로 민주화를 위한 투쟁의 대열은 대통령이 되고자 하는 대권욕에 감추어진 채 문경지역은 전혀 민주화 인사와는 관계가 없는 분이 고(故) 김영삼 통일민주당 직계로 내려와 이후 3선 국회의원을 하는 기현상이 발생됐습니다. 필자는 그 이후엔 산업중흥을 이룩한 고(故) 정주영 대통령 후보, 또 한 분의 민주화 거목인 고(故) 김대중 대통령, 서민대통령인 고(故) 노무현 대통령의 대로에 합류하며 함께 해왔었고, 이제까지 보수의 텃밭에서 민주진영에 몸을 담아오고 있습니다만, 또 다시 민주세력들이 분열되고, 급기야 당 선대위원장에 과거 투쟁의 당사자들이였던 5공에 몸을 담은 분이 장의 자리를 차지해, 결국 얼마전 필자는 탈당을 결행했습니다.
이런 저런 이유로 김대중 정부 하에 보상심의위 제1105호로 명예회복을 신청했으나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지난 2009년 11월 기각되었습니다. 그땐 김대중 정부 하인데 담당자는 “유신체제 투쟁에 대한 것만으로 인정을 해주겠습니다”했지만, 저는 “5공 군사독재 투쟁이 포함되지 않으면 그만두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결국은 기각이 되었지만, 저는 엄연한 역사적 사실의 활동가이기에 재심의를 포기했습니다.<현재는 (사)민추협 위원>
그 이후 공직의 길을 포기하고 지역에서 제왕적 군주인 자치시정의 독선, 환경파괴, 문화유적 훼손, 한반도 대운화 등등 모순된 정책들과 관련한 반대집회를 주도하고 의사자 발굴, 환경운동, 지역 농산물 팔아주기, 선거구 모순 헌법소원, 폐광지역 차별 반대 헌법소원, 문경시민온천살리기 투쟁 등등을 주도, 한 마디로 지방지 기자로, 시민운동의 지도자로 활동을 해왔습니다.
특히 독선시정을 타도하기 위해 지역신문인 본지 <문경시민신문, www.mgnews.kr>을 창간하여 독선시정과 싸우다 필화사건으로 93일간 구속되기도 했고, 민주화 기간 동안 이제까지 두 번의 피선거권 규제(장장 15년)를 당하기도 했습니다. 사실이지 기관의 동향파악 대상 해지가 된 것이 불과 몇 년 전 일입니다.
그러다 보니 어언 66세란 나이가 돼 노인의 길로 접어들고 있습니다. 현재는 투쟁 보다는 지역공동체의 공동이익과 공동선을 위해 버섯 시범포를 성공시켰기에 이를 맞춤형으로 하여 귀농-귀촌-귀향 마을 조성에 여생을 걸고 있습니다. 과거 험악한 정치의 현실을 겪고 또 목격했기에 그 길은 제가 갈 길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민주화를 하면서 종교가 아니고는 고독한 자신을 위로할 아무것도 없었기에 어머님과 함께 이제까지 고향 교회를 다니고 있습니다.
더구나 그간의 경험을 바탕으로 글을 쓰며 문경문인협회 회장(전직)과 펜클럽한국본부 회원(현직) 등으로 활동하며 시를 짓고 있습니다. 나이 들어 신문기자 직을 퇴직하여 재능기부를 하고 있는 곳이 제가 창간해 10여 년을 몸 바쳐 발간해 오고 있는 본지인 문경시민신문(www.mgnews.kr)입니다. 이제까지 최주영 선배님의 정치행로에 도움은 주고 동참은 했습니다만, 자신은 정치의 길을 포기했습니다. 몇몇 예외를 제외하고는 한 마디로 정치는 돈과 못된 사람들과 술수와 거짓말들이 모여드는 시궁창이기 때문입니다. 현재까지...
대구교대 동창인 아내는 평교사로 정년퇴임하여 조용한 나날을 보내고 있으며, 가시밭길 제 인생에서 너무 어려운 날을 보내고 있는 아내와 제 가족들과 92살 노모님께 참회의 기도를 올리고 있습니다. 모든 일에 공의로우신 하나님과 이런 가족 분들이 계시지 않았다면 견디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훌륭한 아내의 가르침으로 제 아들은 대기업 법무팀장으로, 이대 약학과를 나온 제 딸은 약학과 졸업의 남편을 만나 일산에서 두 아들의 어머니로 각각 약국을 경영하고 있습니다.
옛 고교시절 청운의 꿈을 나누던 제 옛 친구 하나는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집안에 하나회 장성이 있어 별을 못 달고 현재 대령으로 제대해 외국 공관에 있다가 고국에서 말년을 보내고 있습니다. 이것저것 안 따지고 부를 위해 달려온 친구들은 100억대 이상의 부자가 되어 지역의 장 자리를 차지하며 모든 권력을 다 누리고 있습니다. 또한 계속 기득권 세력에 몸 담아온 친구들과 후배들은 부와 권력과 가정의 평안을 다 누리고 있습니다. 공무원 출신 친구들은 그냥 버티어오니까 모든 혜택을 다 받고서 퇴직의 명예까지 누리고 있습니다.
물론 독립운동이 당연하지만, 독립운동가 자손들은 무식과 가난과 천대 받는 존재로 전락하고 있어 참으로 안타까운 현실이었습니다. 고(故)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의 유지들을 생각하며, 작은 바람이 있다면 단지 헌법상 올바른 일들을 위해 국민 된 도리를 다하려고 살아온 착한 사람들이 대접 받는 그런 아름다운 자유민주주의 참 세상을 꿈꾸어 봅니다. 다시 한 번 『피의 강물을 건너고 죽음의 산을 넘어 숭고한 자유민주주를 도약시킨 현대사의 거목, 고(故) 김영삼 대통령의 명복』을 진심으로 빕니다.
 |  | | ↑↑ 글쓴이 / 김석태 민추협 회원 | ⓒ 문경시민신문 | *김석태 민추협 회원 약력
1950년 경북 문경시 마성면 신현리 출생
문경중(16회), 문경종고 인문과(17회) 졸업
대구교육대학(8회) 및 서경대(구 국제대) 법대(28회) 졸업
1995년 월간 <문예사조> 10월호 수필 및 1997년 좌동 문예지 시 부문 신인상으로 등단.
시집 <독백> <화해와 상생>,
수필집 <아름다운 이별과 만남을 위하여> 칼럼집 <어느 법학도의 고뇌>
편저 역사자료집 <새재 왕건> 옥중육필명상집 <에밀 졸라이고 싶었다> 등 저서
전 문경문인협회 회장,
전 문경시민신문 발행인
현 (사)민주화추진협의회 회원
현 한국문인협회 회원,
현 국제펜클럽 경북회원, 국제펜클럽 한국본부회원
현 문경한원영농조합법인 대표
집 : 경북 문경시 갈밭길 8-6(흥덕동)
사무실 : 경북 문경시 모전동 115-2 번지 208호 문경시민신문
연락처 : 010-6485-91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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