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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 '당교대첩(唐橋大捷)'이라고 부르자.
글쓴이 / 문경시청 문화관광과 문화재담당 학예사 엄원식
문경시민신문 기자 / ctn6333@hanmail.net입력 : 2015년 11월 03일(화) 1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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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경시민신문
우리나라 전체역사를 통틀어 삼대 대첩이라고 한다면 첫째 AD 612년에 고구려의 장군 을지문덕(乙支文德)이 오늘날의 청천강인 살수에서 수나라 30만 대군을 몰살시킨 살수대첩(薩水大捷)을 들 수 있겠다.

그리고 두 번째는 AD 1018년 고려의 장군 강감찬(姜邯贊)이 귀주에서 거란군을 크게 무찌른 사건인 귀주대첩(龜州大捷)이며, 마지막으로 세 번째는 임진왜란이 발발한 1592년 7월 8일 전라 좌수사 이순신(李舜臣)이 이끄는 조선 수군과 일본의 해군 제독인 와키자카 야스하루가 한산도 앞바다에서 맞붙은 한산대첩(閑山大捷)을 일컫는다.

이 모두가 바람 앞의 등불처럼 꺼져가는 국운을 다시 되돌린 실로 역사적이고 대단한 전투라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는 시대별로 수많은 외침 속에서도 민족의 정기를 잃지 않고 국가를 지키기 위해 실로 많은 피를 흘린 민족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숱한 전쟁의 성과 중 적과 맞서 온전한 승리를 거두었다면 과연 믿을 수 있을까?

문경시 공평동에 표석골(表石谷)이라는 동네가 있다. 표석골은 김유신 장군의 당교 전투승리를 기리기 위해 세운 비석이 있는 곳이라 하여 붙은 명칭이다. 당나라 최고의 장수인 소정방의 군대를 맞아 지금의 모전동 일원에서 맞서 싸워 이긴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비석이라고 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현재는 전하지 않고 있다.

만약 이 비석만 온전하게 남아 있었더라면 당교주변에서 벌어졌던 치열한 전투의 승리 상황을 제대로 알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어쩌면 우리가 지금 궁금해 하는 부분도 한꺼번에 해결될 수 있는 부분이다.

↑↑ 문경시청 전정에 있는 당교사적비 전경 (1990년 건립)
ⓒ 문경시민신문
문경시청 앞에는 지난 1990년에 당교사적비를 세워 당교전투의 의미와 의의를 알 수 있도록 기록해 놓았다.

"민족통일의 성업은 국조(國祖) 단군의 개국 이래 우리 민족의 최대 염원이었으니 이러한 숙원을 풀어준 나라가 신라(新羅)였다. 신라가 삼국 통일의 위업을 이룩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청소년들이 건전한 기풍과 자기 문화를 키운 강력한 힘이 있었기 때문이다.

막강한 고구려(高句麗)와 날쌘 백제(百濟)를 아우르기 위하여 일시 당(唐)의 세력을 빌렸지만, 통일을 이룩하고는 당시 세계 최강국이었던 당나라와도 의연히 맞서 싸워, 당군의 말발굽을 우리 땅에서 말끔히 지워버렸다. 이 어찌 장한 자주정신의 발로가 아니랴! 당이 신라의 통일성업을 도운 것은 신라마저 속국으로 삼기위한 욕심에서였다.

신라는 이를 재빨리 간파하고 고구려와 백제의 유민들을 맞이하여 당나라의 침략 야욕을 여지없이 분쇄했다. 삼국통일의 명장 김유신(金庾信) 장군이 침략자로 돌변한 당의 소정방(蘇定方)을 물리친 역사적 다리가 바로 되다리 당교(唐橋)이다.

통일의 비원을 싣고 달리는 3번 국도 옆에 당교사적비를 세움은 통일의 의지를 오늘에 다시 확고히 하려는 것이다. 통일신라의 자주정신과 통일 위업을 이 시대의 점촌 시민도 마땅히 본받아 조국통일의 과업을 앞당겨 실현시키는 횃불이 되자.

1990년 7월 일 국사편찬위원, 문화재위원 한국교원대학교수 문학박사 정영호 지음."

당시는 문경군과 점촌시가 분리되어 있어 비문의 문장 중 '점촌시민'이라는 표현이 보이고, 비문을 지은이가 정영호 박사로 되어 있지만 사실 초안을 제안한 사람은 우리지역 중등 교장 출신인 김시종 시인이다.

↑↑ 문경시 모전동과 함창읍 경계에 있는 당교사적지비 (상주시 건립)
ⓒ 문경시민신문
어찌 되었건 지금은 당교 인근인 문경과 상주의 경계에도 상주시에서 건립한 당교사적비가 있으며 지자체별로 당교전투에 대한 관심과 현양사업이 서서히 달아오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문경시에서는 이곳 주변에 공원을 만들어 당교전투에 대한 역사적 내용을 널리 알리기 위해 용역 시행 등 다양한 노력을 시도하고 있다.

문제는 당교전투와 관련한 기록이 그리 많이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기록 또한 소략하여 당시의 상황을 정확하게 그려낼 수 없다는 것이 조금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먼저 일연의 삼국유사에 실린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三國遺事1卷-1紀異-太宗春秋公-13 又新羅古傳云

新羅古傳云 定方旣討麗濟二國 又謀伐新羅而留連 於是庾信知其謀 饗唐兵之 皆死坑之 今尙州界有唐橋 是其坑地

신라고전에는 “정방이 이미 고구려 백제 두 나라를 치고 또 신라를 치려고 머물고 있었다. 이에 유신은 그 음모를 알고 당병을 초대하여 독약을 먹여 모두 죽이고 구덩이에 묻었다”고 한다.

지금 상주의 경계에 당교가 있으니, 이것이 그 묻은 곳이라 한다. 이 기록으로만 살펴본다면 후일 신라와 당과의 마지막 전투로 알려져 있는 기벌포 전투(伎伐浦戰鬪)는 소정방 없이 치러진 전쟁일 수 밖에 없으며, 당군의 사기가 꺽인 상태이므로 응당 신라와 당과의 마지막 전투는 바로 당교 전투가 아닌가 한다.

다음은 조선시대의 역사서인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실린 내용이다.

新增東國輿地勝覽 권29 慶尙道 咸昌縣 橋梁

唐橋 在縣北六里 新羅古記 蘇定方旣討麗濟 又謀伐新羅留屯于此 金庾信知其謀 粲唐兵醉而皆抗之後人因名唐橋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권29 경상도(慶尙道) 함창현(咸昌縣) 교량(橋梁)조

“당교(唐橋). 현의 북쪽 6리에 있다. 신라고기(新羅古記)에, 소정방(蘇定方)이 이미 고구려와 백제를 치고 또 신라를 치려고 여기에 머물렀을 때, 김유신(金庾信)이 그 계획을 알고, 당의 군사에게 잔치를 베풀어 취하게 하고 모두 여기에 묻어 죽였다. 뒷날 사람들이 그것으로 당교"라고 이름 지었다.

그렇다면 많은 장소를 두고 하필 문경 모전동에서 신라군과 당군이 마주친 것일까? 많은 의문을 낳게 한다.

우리지역 출신 이도학 교수(한국전통문화대학교, 문경 가은 출신)의 논문내용을 통해 어느 정도 숙제는 풀 수 있을 것 같다.

당교(唐橋)가 소재한 문경의 모전동과 상주 함창 지역은 신라 수도 경주에서 한강유역으로 진출하거나 백제로의 진출 과정에서 반드시 거쳐야할 정도로 전략적 비중을 지닌 곳이었다. 그러한 추정은 신라의 백제 정벌 시 그 왕도인 부여 침공을 겨냥한 태종무열왕의 동선을 통해서 알게 된다. 즉 태종 무열왕은 지금의 경기도 이천에 해당하는 남천정(南川停)에 행차한 후 다시금 회군하여 지금의 백화산성인 상주 금돌성(今突城)에 전선사령부를 설치한데서( 『三國史記』권 5, 태종무열왕 7년 6월 조.)유추할 수 있다.

또한 신라는 계립령로의 방비를 위해 많은 성들을 요소 요소에 축조했음을 알 수 있다. 문경에도 교통의 요로에 자연지세의 험고(險固)함을 이용하여 성들이 곳곳에 포진하였다. 깎아지른 듯한 북벽(北壁) 위에는 마고성(麻姑城)이 문경 읍내를 굽어보고 있다. 또 이곳에서 점촌과 상주 방면으로 진출하기 위해서는 문경 남쪽 9km 지점에 소재한 곶갑천(串岬遷)을 지나야만 한다. 문경 지역 3대 험조처(險阻處)의 하나인 곶갑천은 묶어 놓은 듯한 양 산협의 가운데를 관류하는 하천인데, 이 하천 옆 벼랑에는 3km에 이르는 잔도(棧道)가 나 있다. 더욱이 곶갑천(串岬遷) 양안에는 신라가 축조한 고모성(姑母城)과 고부성(姑父城)이 응대하고 있는 천험(天險)의 요진(要鎭)이었다.

이것으로 보아도 문경지역이 삼국시대 이래 군사적, 교통적 요지로서 늘 중요한 역할을 수행해 왔음을 알 수 있다. 이 시기의 군사시설들은 임진왜란 시에도 험조처임이 충분히 인식되어 왜군의 경로에 많은 고민을 낳게 했다.

앞서 언급된 삼대 대첩 모두가 국가를 존망의 위기에서 구해낸 엄청난 전투였음은 누구나 주지하는 사실이다. 그러나 당교전투에서 당군에게 패배했다면 어떠한 결과가 나오리라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단순한 전투로 볼 사건이 아니다. 당교의 사건은 이제 당당히 '당교대첩”으로 불러주어 지금의 우리가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 주었다는 사실을 절대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문경시민신문 기자  ctn6333@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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