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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칭 '민주화의 횃불, 민추협과 민산의 활동' 역사서 원고
김덕룡 민추협 고문의 역작에 김석태 회원 기고 전문
민추협고문 <권노갑, 김덕룡>, 회장 <김무성, 박광태>
문경시민신문 기자 / ctn6333@hanmail.net입력 : 2015년 04월 29일(수) 2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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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경시민신문
최초로 동서화합의 민주화 단체 민추협 김석태 회원의 가시밭길 인생, 그래도 후회는 없습니다.

아내와 93살 노모와 가족들에게는 참회의 기도를 올립니다.

밝은 민주사회인데, 아직도 갈 길이 요원합니다.

공동화-황폐화 돼가는 농촌,
송화고버섯 맞춤형 귀농-귀촌-귀향 운동으로 여생을 보낼 것입니다.

저 김석태(1950년 10월 3일 생)는 대구교육대학을 차석으로 졸업하여 발령받기 어려운 서울 왕십리 소재 서울무학초등학교에 지난 1971년 3월 1일부터 지난 1975년 2월 28일까지 재직하고, 지난 1975년 3월 1일부터 1978년 2월 13일까지 서울천호초등학교 교사로 재직하였습니다. 저의 꿈은 고교시절 가장 친한 친구들과 약속했습니다만, 가정의 어려움을 이기고 대구교대를 졸업하여 4년제 대학을 마치고, 초등-중등-고등 선생을 거쳐-대학교 교수가 되어 종합대학교 총장이 되는 소박한 꿈이었고, 각자의 꿈을 이루고 난 다음 만나자고 했습니다.

위 초등교사 재직을 하면서 지난 1974년 3월 1일 서대문에 있는 국제대학(현 서경대학교) 법학과 야간부에 입학하여 낮에는 교사로 밤에는 대학생으로 주경야독을 했습니다. 지난 1974년부터 1978년까지 밤에는 위 대학에서 개최된 유신반대 집회에 참가하고, 낮에는 유신이념 홍보와 유신교육 풍토에 불만을 품어오다 위 대학 졸업과 동시(1978년 2월 13일)에 원하지 않은 면직을 했습니다.

이후 삼성 등 여러 곳에 입사필기시험에 합격했지만, 번번이 면접에서 낙방하고 어렵게 대한통운 포항지점에 발령을 받고(1978년 3월 1일) 경북에서 초등교사로 재직하고 있던 아내와 결혼한 지, 3년 만에 구룡포에서 신혼살림을 차렸습니다. 열심히 대한통운회사 일선에서 근무했으나 역시 현장 책임자들은 거의 다 군부 출신들이 장악하여 회사가 병영화 되어가고 있어 공채들이 설 자리가 없어졌고, 또한 일방적으로 타지 근무로 권유를 받는 등 군사독재에 염증을 느껴 자퇴를 하고(1980년 초), 자신의 시위 전력 이력도 모른 채 순진하게도 법대 졸업의 꿈인 사법시험에 도전해 보았습니다.

호미곶에서 셋방을 얻어 대보초등학교로 발령 받은 아내의 도움으로 열심히 도전했습니다. 간간이 경찰에서 탐문하여 동향을 파악하기도 했으나, 그때만 해도 일상적인 일이라 무시했습니다. 당시 간첩이 나타나 예비군 소집이 있었는데, 어쩐지 저에게는 실탄을 지급치 않았습니다. 되돌아보니 동향파악 대상이었습니다.

아내의 근무지가 상주군 중동면 회상리 중동초등학교로 전보되어 사법시험 도전 3년 만에 이곳에서 그 어렵던 제24회 사법시험 1차에 합격하고, 고향인 문경으로 아내의 근무지를 옮기고 저도 고향 집에서 2차 도전을 시작했습니다. 그간에 사법시험 도전이 성공한다 해도 당초 제 꿈인 훌륭한 스승이 되기 위해 지난 1981년 11월 1일 경상북도교육위원회에서 시행한 중등교사임용후보자선정경쟁시험 일반사회과에 우수하게(6/8) 합격하고도 합격자 명부의 유효기간(82년 3월 1일부터 84년 3월 10까지)이 만료될 때까지 임용이 되지 않았습니다. 시위전력자의 당연한 결과인데도 그땐 정말 믿기지 않았습니다. 그 이후 서울 모 사립교사 친구의 꼬임에 빠져 서울 오류동의 모 기술고등학교 교장 선생에게 큰 대접을 해가며 강사 자리를 얻었으나, 시험 합격은 하나의 자신의 이력일 뿐 정식 교사 자리는 교장과 이사장의 권한이었습니다. 저는 이때가 가장 후회되는 순간들이었습니다.

고향에 돌아와 이런저런 고초를 겪으며 많은 고민을 했습니다. 과연 이런 국가사회의 존재가치가 있는가, 국법을 공부하여 사법시험 1차의 관문을 통과했지만 책상머리에 앉아 공부하여 자신의 꿈을 이루는 것이 저와 가족과 지방과 조국을 위한 길인가, 광주사태가 발발하여 무고한 시민들이 군화 발에 짓밟히고 있었는데, 저만의 안일을 위해서 공부를 해야 하는가, 참된 조국과 후세대를 위해서 이래야만 되는가, 거의 매일같이 찾아오는 민주화 인사들과 합류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만 책상을 박차고 지역 책임자로 계시던 민주통신 최주영 편집국장(1940년 4월 15일 생)의 휘하로 들어가 지난 1983년부터 현재까지 삶을 함께 하고 있습니다.

그때부터 민추협과 민주산악회 지역회원으로 활동하면서, 광주사태 비디오 배포, 민추협 기관지 ‘민주통신’과 민주산악회 기관지 ‘자유의 종’을 가능한 한 많이 배포하고, 대통령직선제관철 및 민주헌법쟁취 관련 각종 집회 및 시위에 주도적으로 참여했습니다. 이러한데도 공직 외의 경쟁시험은 공정한 줄 알고 자신의 궁극적인 꿈을 이루기 위해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오류동 모 기술고등학교 강사를 해오면서 사단법인 한국사학재단연합회 시행의 서울지역 1987학년도 사립중등학교교원신규임용후보자전형(일반사회-모집 숫자와 합격자가 같아 필히 발령받게 돼 있다)에 합격했지만, 제가 있어야 할 자리에는 이미 다른 비합격자가 채워져 있었습니다. 이런 국가사회의 처절한 모순을 겪었기에 사심 없이 더욱 민주화의 횃불을 밝힐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김대중 정부 하에 보상심의위 제1105호로 명예회복을 신청했으나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지난 2009년 11월 기각되었습니다. 그땐 김대중 정부 하인데 담당자는 “유신체제 반대에 대한 것만으로는 인정을 해주겠습니다”했지만, 저는 “5공 군사독재 반대가 포함되지 않으면 그만두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결국은 기각이 되고 저는 엄연한 역사적 사실이기에 재심의를 포기했습니다.

그 이후 공직의 길을 포기하고 지역에서 제왕적 군주인 자치시장의 독선, 환경파괴, 문화유적 훼손, 한반도 대운화 등 반대집회를 주도하고 의사자 발굴, 농산물 팔아주기, 선거구 모순 헌법소원, 폐광지역 차별 반대 헌법소원 등을 주도, 한 마디로 시민운동의 지도자로 활동을 했습니다. 특히 지역신문을 창간하여 독선시장과 싸우다 필화사건으로 93일간 구속되기도 했고, 두 번의 피선거권 규제를 당하기도 했습니다. 사실이지 기관의 동향파악 대상 해지가 된 것이 불과 몇 년 전입니다.

그러다 보니 어언 66세란 나이가 돼 노인의 길로 접어들고 있습니다. 현재는 투쟁 보다는 지역공동체의 공동이익을 위해 송화고버섯 시범포를 성공시켰기에 이를 맞춤형으로 하여 귀농-귀촌-귀향 마을 조성에 여생을 걸고 있으며, 문경문인협회 회장(전직)과 펜클럽한국본부 회원(현직) 등으로 활동하며 시를 짓고 있습니다. 제가 퇴직하여 재능기부를 하고 있는 곳이 제가 창간해 7년을 몸 바쳐 발간해 오고 있었던 문경시민신문(www.mgnews.kr)입니다. 이제까지 최주영 동지의 정치행로에 도움은 주고 동참은 했습니다만, 자신은 정치의 길을 포기했습니다. 몇몇 예외를 제외하고는 한 마디로 정치는 돈과 못된 사람들과 술수와 거짓말들이 승리를 하기 때문입니다. 현재까지...

대구교대 동창인 아내는 평교사로 정년퇴임하여 조용한 나날을 보내고 있으며, 가시밭길 제 인생에서 너무 어려운 날을 보내고 있는 아내와 제 가족들과 93살 노모님께 참회의 기도를 올리고 있습니다. 모든 일에 공의로우신 하나님과 이런 가족 분들이 계시지 않았다면 견디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훌륭한 아내의 가르침으로 제 아들은 서강대 법대를 졸업하고 LS산전 법무팀장으로, 제 딸은 이화여대 약학과를 졸업하고 중대 약학과 졸업의 남편을 만나 일산에서 두 아들의 어머니로 약국을 경영하고 있습니다.

옛 고교시절 청운의 꿈을 나누던 제 옛 친구 하나는 해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집안에 하나회 장성이 있어 별을 못 달고 현재 대령으로 제대해 외국 공관에 있다가 말년을 보내고 있습니다. 이것저것 안 따지고 부를 위해 달려온 친구들은 100억대 이상의 부자가 되어 조합장이다 지역 단체장이다 모든 권력을 다 누리고 있습니다. 또한 계속 기득권 세력에 몸다워 온 친구들과 후배들은 부와 권력과 가정의 평안을 다 누리고 있습니다. 공무원 출신 친구들은 그냥 버티어오니까 모든 혜택을 다 받고서 퇴직의 명예를 누리고 있습니다.

물론 독립운동이 당연하지만, 독립운동가 자손들은 무식과 가난과 천대 받는 존재로 전락하고 있어 참으로 안타까운 현실이었듯 올바른 일들을 위해서 살아온 사람들이 대접 받는 그런 아름다운 자유민주주의 참 세상을 꿈꾸어 봅니다.

*김석태 회원 약력

1950년 문경시 마성면 신현리 출생
문경중-문경종고 졸업
대구교육대학 및 서경대(구 국제대) 법대 졸업
1995년 월간 <문예사조> 10월호 수필 및 시 부문 신인상으로 등단.

시집 <독백> <화해와 상생>,
수필집 <아름다운 이별과 만남을 위하여> 칼럼집 <어느 법학도의 고뇌>
편저 역사자료집 <새재 왕건> 옥중육필명상집 <에밀 졸라이고 싶었다> 등 저서

전 문경문인협회 회장,
전 문경시민신문 발행인
현 문경시민신문 대표
현 (사)민주화추진협의회 회원
현 한국문인협회 회원,
현 국제펜클럽 경북회원, 국제펜클럽 한국본부회원
현 문경한원영농조합법인 대표

집 : 경북 문경시 갈밭길 8-6(흥덕동)
사무실 : 경북 문경시 모전동 115-2 번지 208호 문경시민신문
연락처 : 010-6485-91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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