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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은 '방짜유기'
이봉주 : 중요무형문화재 제77호 유기장 방짜유기 명예보유자
문경시민신문 기자 / ctn6333@hanmail.net입력 : 2014년 03월 25일(화) 1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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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봉주 방짜유기장
ⓒ 문경시민신문
이봉주 : 중요무형문화재 제77호 유기장 방짜유기 명예보유자


☞ 약력
- 1926년 : 평북 정주군 덕언면 출생
- 1948년 : 22세 때 월남하여 서울 용산 ‘납청 양대 유기’ 공장 입사
- 1957년 : 서울 강서구 염창동에 ‘평북 양대 방짜유기’ 공장 설립
- 1981년 : 안양시 박달동에 “납청유기공방” 설립
- 1982년 : 제7회 전승공예전 입상(문화공보부 장관상)
- 1983년 : 중요무형문화재 제77호 유기장으로 지정. 새로운 공구 개발
- 1988년 : 88 서울 올림픽 축하 공연용 바라 400쌍 제작·기증
- 1988년 ~ 1995년 : 사단법인 전통공예 기능보존협회 이사장 역임
- 1991년 : 납청양대(방짜유기) 저술
- 1993년 : 국립박물관 개관 전시용 작품(제기, 반상기 등 128점) 기증
오사카 문화원 전시작품 기증
- 1994년 : 특대 징 제작
- 2011년 : 회고록 발간 ‘메질 많이 해야 황금으로 빛난다’
- 2003년 : 현재 : 문경시 가은읍 갈전리 공방 운영
_ 2007년 : 대구 유기박물관에 기증

- 북한 평안북도 정주 출신인데, 고향은 어떠한 곳인가?
“인물이 많이 난 곳이다. 대대로 학향이며 마을 서당이 많기로 유명했다. 조선 말기에는 새로운 문물과 기독교 전파로 인해 서양문화도 일찍 들어와 개화가 남쪽 보다 빨랐고 기독교가 왕성해서 주일날(일요일) 시장이 서지 않을 정도였다. 또한 뛰어난 선각자를 많이 배출했는데 남강(南崗) 이승훈(李昇薰) 선생이 설립한 정주 오산학교에서 특히 많은 애국항일투사가 배출되었다. 3.1운동 민족대표 33인에도 일개 군에서 이승훈(李昇薰), 이명룡(李明龍), 김병조(金秉祚) 등 세분이나 정주 출신일 정도로 독립운동가도 많았으며, 그 외에 춘원 이광수, 김소월, 백낙준, 현상윤(고려대학교 초대 총장), 백인제(백병원 창립자로 현대의학의 개척자), 방응모(조선일보) 등등 수없이 많다”  

- 고향에 유기산업이 흥왕했었는가?
“동16냥 1근에 석 4냥 5돈을 합금해서 단조하여 만든 그릇을 이북에선 ‘양대’로 남한에선 ‘방짜’라 부른다. 흔히 납청 유기라고 하는데 ‘납청’이란 평북 정주에 있는 지역이름이다. 예부터 널리 알려진 방짜유기의 제작지로 약 400 가구 가량 살았는데 유기 기술자들의 집성촌 구실을 했다. 평양, 사리원, 삭주 등에 방짜 유기공장이 있었으나 이곳 공장의 제작 기술자들은 모두 납청 지역 출신이었다고 전해지고 있어 방짜유기 제작 기법은 오랜 세월동안 납청 지역에서 발달, 계승시켜온 것으로 판단된다”

↑↑ 방짜유기
ⓒ 문경시민신문
- 유기에 대해 간단히 설명해 달라.
“유기는 청동기시대부터 제작되었고 비파형청동검(琵琶形靑銅劍), 다뉴조문경(多紐粗紋鏡)등을 만들 때 이미 사용되었으며, 궁궐의 진상품이나 불상·종 등의 불교용품 또는 악기나 가정의 생활용품으로 널리 쓰였다. 종류로 방짜유기, 주물유기, 반방짜유기로 나누어 지는데, 방짜유기는 구리 78%. 주석 22%의 비율을 정확히 해서 녹여 만든 놋쇠덩이(‘바둑’ 이라 일컬음)를 불에 달구어 망치질을 되풀이해서 얇게 늘여가며 형태를 잡아가는 방법으로 휘거나 잘 깨지지 않고 메자국(망치자국)의 멋이 은은히 남아있는 것이 특징이다. 한국에 주석 생산이 잘 안되어 말레이시아산을 사용하고 있으며, 주물유기는 일명 ‘붓백이유기’라 하는데 합금에 일정한 비율이 필요 없어 색깔, 강도를 자유롭게 변화시키며 같은 제품을 다량 생산할 수 있으나 단조가공은 불가능하지만 섬세하고 아름다운 다양한 형태의 제품을 생산할 수 있다. 흔히 ‘안성맞춤’이란 말로 유명한 경기도 안성 유기가 주물유기이다. 끝으로 반방짜유기란 주물유기에 방짜유기 제작방법을 절충한 기법으로 먼저 주물유기 기법으로 반제품을 만든 후 달구어가면서 오목하게 판 곱돌 위에 놓고 ‘궁구름대’라는 공구로 유기의 끝부분을 오목하게 만드는 방법이다”

- 월남하게 된 경위는?
“해방되고 나서 평민들도 자의가 아닌 강제에 의하여 정치에 휘말릴 수밖에 없었다. 토지개혁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숙청당하고 마을에서 쫓겨나는가 하면 특히 우리 집은 기독교가정으로 일거수일투족을 감시받는 요시찰 대상으로 아버지의 죽음과 내 환경이 월남하지 않으면 도저히 살아남을 방법이 없어서 월남을 감행했다. 당시 내가 갑자기 떠나면 농사지을 일손이 부족해지므로 어머님의 걱정이 크셔서 일단 내가 먼저 월남하고 아내는 일년 더 농사를 도와 준 후 월남하기로 하고 나부터 떠나왔었다. 그것으로 우리 부부는 이별이었다. 같이 38선을 넘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같이 월남했으면 평생 헤어져 살게 되지 않았을 것이다. 장로 딸에다가... 원치않는 김일성 찬양을 하다가 불행하게 죽었다고 들었다”

- 한국 방짜유기를 조명하다보면 ‘탁창여’씨가 중요한 위치에 계신다. 어떠한 분이신가?
“고향 납청에서는 양대공장 주인을 ‘방주’라고 불렀다. 그래서 모두들 ‘탁방주’라 불렀는데 평생 술도 안하신 지혜로운 분이셨다. 평북 박천군 서면 운포동 사람으로 하마터면 남한에 방짜유기 기술이 단절 될 뻔한 것을 잇게 한 분이시며 처이모부 되신다. 가은에 탁방주 공적비를 만들어 놨는데 방짜기와 2,200장에 중량이 5톤 넘는 규모로 1,000년이 지나도 부식하지 않고 소가 올라가도 깨지지 않을 정도로 단단케 했으며, 동파될 염려 없이 유기로 정성껏 만들었다. 근대 말에는 일본에 의한 유기 공출이라는 명목으로 각 가정에서 소유한 거의 모든 유기들을 수탈당하였는데 그후 해방과 더불어 유기가 다시 성행할 때 그 산업 한가운데 탁방주가 계셨다. 광복 직후 이남에는 주로 징 꽹과리 위주로 만들었고 북한 땅엔 다양한 제품을 잘 만드는 탁월한 기술자가 많을 때 38선이 생겨서 유통이 잘 안되자 월남한 납청 기술자들을 모아서 서울에 공장을 차렸던 것이다. 나 또한 월남한 직후부터 이곳에 취직하여 일을 배웠다. 사위가 ‘송자’ 전 연세대 총장이다”

- 방짜유기의 장래성은?
“공개토론을 하는 기회가 있을 때 마다 난 강조한다. 연료나 기법 등 작업 환경은 많이 바꿔 놓았으니 후대사람들은 이 기법을 가지고 생활에 적용시키고 세계에 공헌할 수 있는 작품을 개발하라고! 식품공학박사나 생명공학 박사에 의하면 대장균이 부엌에 많은데 씽크대를 유기로 할 경우 세균이 못산다고 하니 활용 가능하지 않은가? 행주도 방짜유기에 담궈 놓으면 세균이 죽는다. 0157이란 균도 살균된다. 방짜유기 찬합에 생선회를 넣어두면 3일이 지나도 꼬들꼬들하다. 미나리나 야채를 씻을 때 놋성기에 담가 두었다가 씻으면 거머리나 벌레 등이 죽거나 도망가는 것을 쉽게 볼 수 있다. 골프채도 만들 수 있다. 의료기구 종류로 침이나 칼, 수술하게 되면 장기를 담는 그릇도 가능하다. 유기는 얼마든지 발전 할 수 있다. 후배들은 전 세계 사람들이 선호하는 물건들을 만들어라”

- 가은에 오게 된 동기는?
“유기공장은 지저분하고 시끄러우니까 변두리로 자꾸 이전하는 속성을 지니고 있다. 공장 이사만 8번째인데 마지막 공장 동네였던 안양에선 시끄럽다고 민원이 들어오자 안양시청에서 계고장을 보내와서 시화공단으로 땅을 1,000여 평 사서 이전을 했다. 다시는 이사 안하고 평생 살 거라고 생각했는데 시화공단에 환경오염이 생겨서 그릇을 만들어 놓으면 일주일도 못가서 변색되어 어쩔 수 없이 또다시 이전을 고려하며 터를 물색하다가 상주 은척을 알게 되었다. 그곳 면장님의 적극적인 추천아래 터도 무상대여하고 공장도 다 지어주겠다며 공구만 들고 오라 했다. 지역발전을 꿈꾸는 애국자이셨다. 하지만 우여곡절 끝에 내 돈 주고 가은 땅을 사서 정착하게 되었다”

- 가은에 살아보니 어떠한가?
“도시계획도 모르고 왔지만 이사 오고 난 뒤에 고속도로도 생기고, 공장 앞에 도로도 생기고, 고가다리도 생기고... 이 모든 것이 내가 요청해서 생긴 게 아니라 자연필요에 의해 생긴 것이다. 시골 가면 물건팔기 힘들 거라 지인들의 반대도 심했는데 자가용 시대라서 손님들이 다 찾아오신다. 지리적 위치가 한국의 중간이라서 교통도 편리하다. 내가 시장을 내다보고 산 것도 아닌데 살아보니 굉장히 조건이 좋아서 만족하고 있다”

- 직원이나 자녀는?
“조교인 아들 이형근(56)을 비롯해 25명의 직원이 있는데 나하고 30~40년 일한 사람도 있다. 이젠 공구 및 기계가 좋아져서 2년 정도만 열심히 일해도 숙련공이라 할 수 있다. 중대장 출신에 성균관대 나온 분도 있다. 이곳에 공업고등학교가 있는가? 학생 중 일하고 싶은 사람 있으면 환영한다. 여기 와서 일해라. 이곳은 항상 사람이 필요하다. 여기는 70살이라도 일할 의사만 있으면 얼마든지 계속 일할 수 있다. 숙련공의 장점이다”

- 한 쪽 눈이 실명이다. 무슨 일이 있었는가?
“아픈 경험이다. 유기공장에선 눈 사고 날 일이 없으며 로또 당첨 확률보다 더 낮은데 사고가 났다. 지난 1983년 5월 사고가 나서 눈에선 핏물이 홍수같이 흐르는데 병원 가니까 돈 들고 오라했다. 시간이 지체되었으나 다시 돈을 가지고 와서야 응급치료가 가능했다. 지금이야 의료보험이 잘 되어 있어서 응급실에 가면 돈이 있든 없든 일단 고쳐주고 보지만 당시는 그렇지 않았다. 몹시 서러웠다. 그래서 그 경험 때문에 지금도 심지어 화장실 갈 때도 꼭 지갑을 가지고 다닌다. 사고가 나면 토요일에 사고가 나면 안된다. 눈에선 연신 피가 솟구치고 머리는 퉁퉁 부었는데 담당 의사는 야구 구경갔다며 핸드폰도 없었던 시절이라 연락되질 않았다. 일요일은 병원이 쉬고 결국 월요일이 되어서야 치료를 받았다. 모두들 나보고 죽는다고 수군거렸다. 살아남아도 일 못할 거라 했다. 그러나 열며칠 만에 퇴원해서 한 달 집에서 쉬고 곧장 일했다. 비록 한쪽 눈은 잃었지만 모두들 기적이라 했다”

- 좌우명은?
“사람은 진실하고 노력해야 한다. 진실하면 하늘이(주변이) 도와준다. 1960년대 초에 유기가 안 팔리니까 스텐공장을 차려 월 6% 이자를 주고 발동기를 샀는데, 부산서 모셔온 기술자 6명이 시운전하다가 폭발을 했다. 새발동기가 다 깨져버렸다. 어쩔수 없이 다시 돈을 빌려 발동기를 재구입해서 돌렸다. 난 대안을 찾는다. 이왕 이렇게 폭발한 거 걱정하면 뭐하나? 술 먹으며 좌절하면 뭐하나? 항상 긍정적으로 무슨 일이 있어도 포기 하지 않고 대안을 찾는다”

- 살면서 가장 힘들었을 때는?
“38선을 넘을 때의 죽을고비와 60년대 말 유기가 몰락했을 때이다. 당시 연탄사용 가정이 기하급수로 늘어나 연탄가스에 쉽게 광택이 변색되자 스테인리스와 알루미늄 사용이 본격화되어 우리 회사가 파산했다. 큰 빚에 눌려 자살하고 싶은 생각밖에 없었으나 자포자기 하지 않고 죽으라 노력하며 건축현장에서 소위 노가다라는 일을 하고 아내는 길가에서 호떡을 팔며 3년 만에 재기에 성공해서 오히려 더 나은 기업을 일궈냈다”

- 북한에 계신 어머님 소식은?
“난 아무리 추워도 월남한 이후론 절대 장갑을 안껴봤다. 나는 7남 2녀 중 차남이다. 나에게 동생들 잘 보살피라고 신신당부하시던 어머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어머님은 나보다 훨씬 더 추운 고장에 사시면서 장갑도 안끼고 사는데 만나서 장갑을 선물로 드린 후 나도 끼려고 미뤘었다. 이젠 습관이 되어서 아무리 추워도 안끼고 산다. 지난 1948년도에 헤어져서 1988년도에 어머님소식을 들었는데 북한을 다녀온 미국 시민권을 소유한 6촌 동생이 지난 1983년 7월 4일에 돌아가셨다고 전해주었다”

- 대구에 있는 ‘방짜유기박물관’과의 관계는?
“내가 평생 제작하고 수집한 방짜유기 275종 1,489점을 대구시에 무상 기증하자 대구시는 수려한 풍광으로 유명한 팔공산 자락에 지하1층, 지상2층(대지면적 17,880m² 건축연면적 3,758m²)의 규모로 유기 문화실, 기증실, 재현실 등 3개의 전시관과 문화사랑방, 영상교육실, 야외공연장, 기획전시실 등의 시설을 갖추어 지난 2007년 5월에 개관하였다”

- 만약 통일이 된다면?
“고향 가서 부모님 산소 가보고 형제들을 만난 후 내 고향 시골교회를 다시 짓고 싶다”

- 여생을 어떻게 보낼 것인가?
“난 일하는 순간이 제일 행복하다. 망치소리 안 나면 이봉주 죽은 줄 알라!!”


☞ 방짜유기를 전통기법으로 제작하는 과정
1. 용해 : 구리와 주석을 합금하여 도가니에 넣어 녹인다.
2. 바둑 : 용해한 쇳물을 곱물(물판)에 알맞게 부어 바둑알을 만든다.
3. 네핌질 : 바둑을 소나무 숯에 달궈 내 여러 명이 메로 쳐서 늘리는 작업을 반복한다.
4. 협도질 : 가장자리의 모양을 바르게 하기 위하여 필요 없는 부분을 잘라낸다.
5. 우김질 : 메로 쳐서 늘린 바둑을 여러 장 겹쳐서 소나무 숯에 달구어 메로 치는 작업을 여러 번 한다.
6. 담금질 : 제질 작업으로 완제품 형태가 이뤄지면 전체를 골고루 달구어 냉각수에 전체를 집어넣어 열처리를 하여 쇠를 연하게 작업한다.
7. 벼름질 : 담금질한 물체의 변형된 부분을 바로 잡는 작업
8. 가질 : 벼름질이 끝난 재료의 산화피막을 제거하여 놋쇠 특유의 색이 나오도록 표면 전체를 깎아내는 작업으로 놋쇠의 본색이 잘 드러나 광이 나게끔 한다.


//류명옥 기획취재팀장 pp7276@hanmail.net
문경시민신문 기자  ctn6333@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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